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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 이순신과 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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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수여행센터1 작성일16-08-16 09:29 조회3,0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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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순신과 여수

준비하라, 준비하라, 준비하라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의 임명을 알리는 교지를 받은 것은 1591년 2월 13일, 그때 그의 나이 47세였다. 그리고 2월 28일 그는 전라 좌수영인 여수에 도착했다. 왜란이 일어나기 1년 2개월 전의 일이다.

이순신이 부임하여 가장 먼저 챙긴 일은 전력을 점검하고 군수물자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남해 연안은 뭍과 바다에서 생산해내는 것들이 비교적 풍부했다. 풍부한 물자는 사람들의 마음을 너그럽게 했고 인심을 후하게 만들었다. 객지 사람이라고 따돌리는 경우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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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그들이 무작정 유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에겐 거센 풍랑을 이겨내는 뚝심이 있었다. 이순신은 자신과 함께 격랑의 역사를 뚫고 나갈 이곳 사람들의 의리와 도리를 알고 또 기개가 있는 백성들이라는 사실을 가장 먼저 고마워했다.

 급박한 전운을 감지한 이순신은 신경이 매우 날카로워져 있었다. 한시도 지체할 여유가 없었기에 제일 먼저 5관 5포를 돌며 모든것을 직접 챙겼다. 우선 거센 물살을 이용하여 적의 침범을 방어할 수 있도록 종포와 돌산을 잇는 철쇄작업을 시작했다. 각 지역과 긴밀하게 연결 되는 북봉연대(봉수대)를 만들고 봉화대의 신호체계를 시시로 점검 했다. 그리고 망마 산정에서는 기마훈련을, 오동도 앞바다에서는 기선 훈련을 시작했다. 여수의 군졸들은 처음엔 유난히 부지런을 떠는 장군을 반신반의 했다. 처음이니까 유난을 떠는 거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일관된 행보와 신념에 찬 눈빛이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몇 달동안 계속되는 것을 보고는 눈 속에서 피어나는 동백꽃처럼 자발적인 믿음과 존경심이 싹텄다. 그 때부터 오히려 군졸들의 더 적극적으로 전쟁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솔선 수범. 뒷짐 지고 서 있지 않고 병사들 앞에서 목책이나 돌을 나르는 장군.그것보다 더 엄한 명령은 없었던것이다.

 

이순신의 전쟁준비는 더욱 힘을 얻어갔다. 흥국사 승려들의 힘을 빌려 성곽 보수작업을 했으며, 각 선소를 재정비함과 동시에 전함 제작을 서둘렀다. 또 각종 화포를 개발하여 전쟁 수행능력을 높였으며 적군에 대한 정보 탐색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언제 어느 때 전쟁이 터지더라도 바로 대처할 수 있도록 지형지물에 맞춰 수군을 재편했다. 또 보이지 않는 전투력 증강을 위해 군사들의 정신력에 날을 세워 군기를  잡았으며 작은 탈선도 엄중히 다뤘다. 사실 이순신은 바다를 잘 모른다. 서울에서 나서 아산에서 자랐기 때문에 바닷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다. 36살에 발포진에서 18개월동안 수군 만호를 했던 것이 수군 경력이 전부였다.

 애국충정만으로는 수군이 될 수 없다. 바닷길,해풍, 조류, 간만의 차, 곳곳에 깔려 있는 암초까지 손바닥 내려 보듯 꿰뚫고 있지 않으면 적을 치기 전에 스스로 바다에 전몰되고 만다.

 이순신은 발포만호를 역임하면서 얻은 경험을 최대한 살려 남해안 지리를 면밀히 파악하고 방어시설을 완벽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대대 손손 바다일을 해왔으며 속속들이 물길을 알고 있는 여수 지역민들의 철저한 후원을 얻어냈다. 임진년을 시작으로 슨 조선의 7년 역사는 이렇게 전라좌수영 여수에서 긴장된 제1막을 올렸다.

 

종고산의 높이를 바꾸다

장군의 명령에 따라 돌을 떡처럼 주무르는 날랜 이봉수는 불과 보름 만에 해발 220m의 무음산 정상에 봉수대를 만들었다. 봉수대는 돌산 방답진 봉수와 연결되는 간봉이 되었으며, 왜적의 침입에 완벽하게 대처할 수 있는 좌수영의 첨병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를 북봉연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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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음산의 북봉연대는 적의 침략을 알리기도 했지만 이순신의 승전을 알리기도 했다.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큰 승리를 거두자 무음산은 승전을 알리는 북소리 같기도 하고 종소리 같기도 한 소리를 연사흘 동안이나 가슴으로 토해냈다. 이 얘기를 들은 이순신이 무음산을 종(鐘)자와 고(鼓)자를 붙여 종고산이라 하였다.

 

금모으기의 원조, 이순신

 

임진왜란 당시 조선왕조의 상비군은 매우 약화되었으므로 의병으로써 수군전력을 보강할 수밖에 없었다. 좌수영 사람들 중에는 군량미와 고깃배, 소금과 면화를 내어 놓는 자가 많았고, 산 속의 승려들도 돌을 날라 성곽을 쌓고 해자를 파고 밥도 짓고 시주도 받으러 다녔다.

 그런데 지자총통 한 자루의 무게가 150여 근, 현자총통도 50여 근이나 되었으니 화포를 만드는 데는 많은 양의 쇠붙이가 필요했다. 이순신은 별도로 승려들을 모아 '화주'라는 이름으로 권선문을 지어 마을을 두루 다니며 쇠붙이를 구하게 했다. 백성들은 입에 넣는 밥숟갈까지 들고 나와 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전쟁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고자 했다. 아마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쇠붙이를 모으는 일이 오늘날 금모으기 운동의 원조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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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들 무기를 들다

 

 흥국사는 임진왜란 당시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울 때 불심으로 의승수군을 일으켰던 사찰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의승수군이 조직적으로 군사를 일으켰다는 기록은 여수의 흥국사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 휘하의 전라좌수영에서 활약하던 승군들은 이곳과 주변의 20여 암자에 머무르며 훈련도 하고 작전도 세웠다. 1593년 1월에 쓴 충무공의 장계에 의하면 1592년 9월 경에 조직된 승군 400여 명이 육지와 바다에서 전투에 참가했다고 쓰여 있다.

 이렇게 결성된 의승 수군은 성을 쌓거나 배를 만들고 해전에 참가하는 등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팔을 걷어붙이고 달려갔다. 특히, 자운과 옥형 스님은 직접 승군 대장이 되어 300여 명의 의승수군을 이끌고 해전에 참여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이들은 관군보다 훨씬 힘든 곳에 배치되었다. 최전방에서 적들의 수급을 거두었고, 해전에서 가장 힘든 격군 등 수행승과는 거리가 먼 일을 도맡았다.

 의승수군은 전투식량으로 해초주먹밥을 준비했다. 전투에 참여할 때면 늘 비상용으로 해초주먹밥을 각자 바랑 속에 넣어두고, 걸으면서 끼니로 해결하곤 했다. 해초는 영양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밥이 잘 쉬지 않게 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흥국사에서는 몇 백 명의 끼니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싸리 나무 통나무의 가운데에 홈을 파서 만든 비사리구시를 사용하였다.

 의승수군 지휘관으로는 자운, 옥형, 성휘, 신해, 지원 등이 있었다. 이들은 여러 고을에서 종군할 승려들을 모집하여 수군에 소속 시키고 적을 무찌르게 했다. 그러나 춘궁기에는 군량미를 공급하기 어려워 돌려 보냈다가 곡식 사정이 나아질 무렵에 다시 원대복귀 시켰다.

흥국사 승군의 전통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와해되지 않고 오래도록 계속 됐다. 1729년의 '봉황대루상량문', 1803년의 '적묵당상량문'에는 3명의 승장과 300여 명의 승군 명단이 남아 당시 의승수군의 전과를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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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여수시 숨겨진 이야기속의 미항 여수 나들이​

 

 

[이 게시물은 여수여행센터1님에 의해 2018-03-09 11:19:08 포토노하우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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