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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 여수와 승전고,이순신과 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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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수여행센터1 작성일16-08-16 13:29 조회2,9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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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여수와 승전고

 

만약에 호남이 없었다면 어찌 이 국가가 있을 수 있으리까? 

 

계사년(1593) 7월 16일 이순신이 여수에서 한산도로 진을 옮긴 다음날 지평 현덕승에게 올리는 답서에 나오는 글귀다.

 과연 그렇다. 전라좌수영이 임진.정유 7년 전쟁 동안 남해 바다를 지키지 못했다면 남쪽 평야에서 나오는 풍부한 곡식을 지키지 못햇을 것이다.

선조는 이미 피난을 가고 조정은 비어있어 단 한 톨의 군량미도 지원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전라좌수영 여수는 전라, 경상, 충청도까지 삼도 수군의 물자와 병력을 지원해주는 임무를 충실히 감당해냈다.

 1592년의 네 차례 해전은 모두 여수에서 발진했다. 그리고 모두 승리하여 여수로 돌아왔다. 이처럼 전쟁마다 조선 수군에게 승리를 안겨준 이순신 함대는 여수에서 훈련을 했고, 여수에서 발진을 했으며,그리고 다시 또 여수로 귀항하여 다음 전투를 위한 재정비를 했다.

 이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 싸여 풍부한 어획량을 확보할 수 있고, 호남땅의 풍성한 가을걷이가 있었기 떄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곡화목장에서는 말이 봉산동 풀무간에서는 철이, 금오도와 고돌산에서는 아름드리 목재들이, 우국충정을 지는 이곳 지역민들이, 모두 힘을 모아 나라를 지켜낸것이다.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를 조금 더 깊숙이 들여다 보면 '약무여수 시무호남(麗水 是無湖南)'이 보일 것이다.

 

 

5. 이순신과 효 - 송현마을

어머님을 여수에 모시다

 

이순신이 좌수영으로 부임해와 군사에게 물었다.

"근처에 효성이 지극한 사대부 집안이 있느냐?"

"옛날 간성 댁이 고음천 송현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이순신은 정씨 문중에 어머님을 모셔달라고 정중히 부탁을 드렸다.

송현마을은 햇빛이 따사로운 양지마을이었다. 남쪽으로 탁 트인 푸른 가막만 바다를 제외한 나머지 삼 면은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아늑했다. 전쟁통에 어머님을 가장 편히 그리고 안전하게 모실 곳이었다.

 예로부터 효자 집안에서 충신이 나온다 했다. 부모도 제대로 모시지 못한 자가 어찌 나라의 큰일을 도맡아 할 수 있겠는가. 이순신의 난중 일기에는 노모에 관한 기록을 88일분이나 남기고 있다. 효도는 모든 도리의 근본이다. 전쟁 중에도 어머님을 곁에 모시고 효를 행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순신의 인물됨을 살필 수 있다.

 정씨 문중은 1593년부터 약 5년 동안 이순신의 어머님과 그 일가 친족들을 모시면서 그들의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늘 세심히 살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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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슬 이야기

 

송현마을 입구로 들어가는 들판에는 우슬이라는 야생풀이 지천으로 깔려있었다. 우슬은 여수에서 많이 나는 토종 약초인데 관절염에 특효가 있었다. 그래서 여수에서는 이 우슬을 말정갱 풀이라고도 하고 쇠물팍 풀이라고도 불렀다. 말이든 소든 무릎 관절에 특히 효험이 뛰어나 이렇게 불렀던 것이다. 이순신의 어머니에겐 심한 관절염과 천식이 있었다. 이순신은 우슬 뿌리를 달여 어머님께 드릴 수 있음을 크나큰 다행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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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족

 

이순신은 어머님의 발을 씻어드리는 일을 가장 즐거워했다. 주글 주글한 허연 발에 힘없이 붙어 있는 발가락들을 보고 있으면 눈물이 왈칵 쏟아지기는 했으나 발을 씻으신 후엔 피곤이 풀린다는 어머님의 치하에 어린애처럼 마냥 즐거워했다.

 어머님의 좋아하시는 표정을 마음에 담고 싶어 이순신은 시간이 허락하는대로 어머님 발을 씻겨드렸다. 발을 씻겨드릴 때는 늘 손수 우물에서 물을 길러왔다. 그 일만은 아내 방씨의 도움도 받지 않았다. 발을 씻겨드릴때만큼은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하고 싶었던 것이다. 버선을 벗기고, 자신의 손으로 먼저 발에 물을 조금 적시고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장군이 된 후 전사할 때까지 누구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은 어머님이 유일했다. 장군은 장군 이전에 아들이었다. 참 반듯하게 잘자란 아들이었다.

 

효도일기

 

이순신은 한산도로 진을 옮긴 후, 지척에서 모시다가 거리가 멀어진 어머님의 안부가 몹시 궁금했다. 척후선이 방답진과 순천부 선소를 오갈 때마다 그곳 근황을 알아오게 하여 그나마 위안이 되었지만 그 회한이야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었겠는가. 그의 마음을 달래주는 것은 단 몇줄의 일기를 쓰는 일이었다.

 

1595년 6월 초 9일

 맑다. 몸이 아직도 쾌하지 않는다. 답답하고 걱정된다. 저녁에 원수 군관 이희삼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이곳에 왔다.(중략)

 저물녘에 탐후선이 들어와 어머님이 이질에 걸렸다고 했다. 걱정이 되어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1595년 7월 14일

 저녁나절에 개었다.(중략) 어머님께서 병이 나아 편안하시다고 한다. 이 얼마나 다행인가

 

이순신의 난중일기는 어머님의 소소한 근황까지 살펴 적어나간 하나의 효도일기였다.

 

살아서는 살 집을, 죽어서는 쉴 집을 마련해주는구나

 

어머님은 이순신이 모함에 빠져 투옥되었다는 아들의 기막힌 소식을 듣고 통곡을 하며 아산 고향으로 향했다. 하지만 도중에 풍랑을 만나 갖은 고생을 했고 고령의 나이와 심신까지 상해 결국 82살로 숨을 거두 었다. 송현마을을 떠나자마자 비극을 맞은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천지가 무너진 듯하여 몸을 지탱할 수조차 없었다.

 어머님을 위한 관이 여수에서 도착했다. 전라좌수영은 살아서도 어머님 살집을 마련해 주더니 죽어서도 쉴 집을 마련해 주었다. 소나무로 짠 관은 얼마나 다듬과 마름질을 잘 했는지 튼튼했다. 좌수영 사람들의 애틋하고도 깊은 정에 이순신은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관이 살뜰해도 임종을 하지 못한 자식의 불효를 용서 해줄수는 없었다. 이순신은 관을 부둥켜안고 복받치는 오열을 참지 못했다. 그가 감옥에 갇히는 신세만 아니었더라도 어머니가 연로하신 몸을 이끌고 아산땅으로 가자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객사 죽음이라니, 이런 비참하고도 통탄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본영 사람들이 계속해서 어머님을 보살펴 드렸다면 이런 억지 죽음을 재촉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순신은 죽고만 싶었다. 자신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다는 것도, 백의 종군하여 전쟁에 다시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사실도, 발이 땅에 닿지 않고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기분도, 우박 같은 소나기를 뒤집어 쓰면서도 그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것도, 다 일일이 헤아릴 경황없이 아득하고 아찔하기만 했다.

 

1597년 4월 16일

 배를 중방포에 옮겨 대고 영구를 상여에 싣고 집으로 들어왔다. 마을을 바로보고 있자니 한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찢어지는 그 아픔을 어떻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렸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맥이 다 빠진데다가 남쪽 길 또한 급박하니 부르짖으며 울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따름이다.

출처 : 여수시 숨겨진 이야기속의 미항 여수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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