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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 이순신과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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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수여행센터1 작성일16-08-16 08:52 조회2,8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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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순신과 이순신

이순신은 한 사람이 아니었다.

전쟁에 나가 코가 잘려 돌아온 사람, 귀가 잘려 죽은 사람, 머리가 댕강 잘려 진흙에 쳐 박힌 사람 . 세상은 온통 비릿한 피 냄새로 넘실거렸고, '전쟁'이라는 그 잔혼학 피바람이 언제 닥칠지 또 언제 그칠지 모른다는 깜깜한 공포에 싸여 있었다.

하지만 전라좌수영인 여수는 그래도 평온한 편이었다. 이렇다할 전쟁도 없었고 왜적들의 침입도 사실상 없었다. 왜적들이 나라를 온통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있었지만,연전연승을 거듭한다는 이순신의 소문은 남해안을 넘나들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백성들에게 이순신은 생계꾸러미보다, 은밀한 동굴보다, 숨겨놓은 뗏목보다 더 꽉 붙잡고 싶은 단 한줄기의 빛이요 희망이었다.

게다가 이순신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종횡무진 바다를 오간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장군이 방답진 선소에서 배 만드는 것을 감독한다고 해서 돌산도로 가면 어느 새 장군은 본영의 선소에서 쇠사슬을 매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고소대에서 전략회의를 마치고 화정면으로 떠났는데 어느새 석창성을 돌고 있다고도 했고, 진해루에서 활을 쏘고 있다고도 했다. 누군가는 이순신이 축지법을 쓴다고 했고, 누군가는 둔갑술을 부린다고 했다.

임진년 4차례 해전에서 보여준 이순신의 놀라운 연전연승이 축지법이니 신통술이니 하는 바람결에 떠도는 믿기 어려운 소문들에게 믿음을 심어준것이었다.

정말 이순신이 둔갑술이나 축지법을 썼을까? 그 대답은 난중일기 임진년 1월 10일에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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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산 방답진은 삼도수군통제영의 전초기지로 중요한 군사요충지의 하나이고, 방답첨사는 전라좌수사를 가장 측근에서 모셔야 하는 임무가 막중한 자리다. 그 방답진 첨사로 같은 이름의 이순신이 부임해 왔다는 것이다.

이런 우연이 또 있을까? 이후 난중일기에 방답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순신은, 장군과 이름이 같은 또 한 분의 이순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자, 상상해 보라. 판옥선 위에 우뚝 선 장군도 이순신이고, 대해전에 출전하는 선봉장도 이순신이다. 순찰을 도는 장군도 이순신이고, 돌산도에서 배에 쓸 목재를 운반해 오는 책임자도 이순신이다. 맡은 책임을 다 하지 않는 군졸들에게 곤장을 치는 장군도 이순신이고, 군졸들을 훈련시키고 봉화대에 불을 올리게 지시하는 자도 이순신이다.

그러니 바람결의 그 소문은 진실이 아니면서도 진실인 셈이었다. 바다에 있는가 하면 어느새 육상에서 호령을 하고 있고, 동헌에서 장계를 올리는가 하면 잡아온 왜적들의 목을 치게 했던 이순신. 어느새 그는 시공을 초월한 초인적 인물이 되어 있었다.

임진왜란 중에 유독 전라좌수영인 여수 앞바다에서만 큰 해전이 없었던 이유도 바로 이순신 때문이었다. 이순신에게 참패를 거듭한 왜군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앞다투어 도망을 갔다. 그러니 이순신이 늘 좌수영을 지킨다는 여수 앞바다 근처에는 왜군의 그림자도 얼씬할 리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왜적 척후병들의 정보에는 이상하게도 방답진에 늘 이순신이 상주해있었으니까.... 한산도와 방답진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갈 수 있는 이순신의 신통한 능력은 왜군의 어리석은 정보와 판단이 만들어준것이나 다름 없었다. 결국 이순신이라는 이름 세 글자에 겁을 잔뜩 먹은 왜군은 세계 해전사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23전 23승이라는 완벽한 승리를 이순신에게 바치고 말았던 것이다.

방답 이순신은 충무공 이순신을 끔찍이 모셨다. 다른 사람은 전쟁이 나면 전쟁터에서 빠져 나올 궁리를 하지만, 장군은,오히려 전쟁 한가운데로 깊숙이 들어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늘 그의 건강과 안위를 염려했다.

그래서 장군을 만날 때는 군평서니와 갓김치 그리고 고들빼기 김치를 돌산에서 챙겨오는 일을 잊지 않았다. 입이 까칠할 때 혀에 침을 돋게 하는 데는 쌉싸래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지는 고들빼기 김치만한 게 없었다.

땅이 기름진 돌산에서는 갓과 고들빼기 등 온갖 채소가 풍부하게 생산되었다. 또 섬에서 해풍으로 익힌 막걸리는 장군뿐 아니라 본영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는 데도 단단히 한 몫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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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 승첩을 아뢰는 이순신의 장계를 보면 방답첨사 이순신의 공적을 확인할 수 있다.

권준, 이순신,어영담, 배홍립, 정운 등은 같이 죽기를 기약하고 의기 투합하여 모든 일을 같이 의논했다. 그러나 권준 이하 여러 장수들은 모두 당상으로 승진되었는데 이순신만이 임금의 은혜를 입지 못하였다.

방답첨사 이순신이 왜적을 물리치는 데에만 힘쓰고 적의 머리를 베어 그 공을 확인하는 일에는 힘쓰지 않았음을 안 장군이 직접 그 공훈을 임금에게 올렸던 것이다. 이순신은 그랬다. 그래서 장군 주위에는 늘 충직하고 정직한 군관들이 모여들었고 끝까지 그와 함께 했다.

장군의 직접 지시를 받는 중간 지휘간이었던 방답 이순신도 전쟁기간 내내 이순신 곁을 떠나지 않았다. 임진년 4월 원균이 구원요청을 해오자 이순신장군은 누구보다도 먼저 방답 이순신과 상의를 했다. 방답 이순신은 옥포해전에서 중위장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임진왜란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서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쓰러지자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여 개선하였다.

과연  그 장군에 그 장수였다. 장군은 장수를 각별하게 챙겼고, 장수는 장군을 충직하게 섬겼다. 이순신과 이순신! 그들은 매서운 칼바람이 불었던 7년 전쟁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역사 앞에 자신을 바쳤다. 마지막 순간까지 진한 향기를 뿜어내다가 온전한 꽃떨기 그대로 툭 떨어지는 동백꽃처럼 진하고 강렬한 생을 살았다. 여수에서 만난 이순신과 이순신. 두 사람은 한 사람이었다. 또한 여수의 꽃이라고 불리는 두 송이의 동백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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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여수시 숨겨진 이야기속의 미항 여수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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