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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소규훈휘 작성일25-09-17 17:52 조회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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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성 공북루


ⓒ 이완우




진주성 공북루. 지난 14일, 임진왜란의 최대 격전지였던 두 차례 진주성 전투의 역사적인 현장을 탐방하였다. 진주성의 북쪽 성루인 공북루(拱北樓) 앞에 입장 매표소가 있었다. 북장대, 진남루라고도 불리는 이 성루는 내성의 북쪽 끝에 있어 내성과 외성의 병파칭코게임다운로드
력을 모두 지휘하는 장소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0여 년 전부터 조선은 개혁하고 국방을 튼실하게 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개혁과 국방력 강화에 미온적이었다. 진주에서 남명 조식은 유비무환의 필요성을 조정에 제시하고 있었다.

국난의 시기에 영웅이 탄생한다황금성게임











▲  진주성 김시민 장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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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완우




진주성 김시민 장군상. 진주성 지휘소였던 공북문을 들어서면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 역사 이야기를 만화로 요약 정리해 놓았다. 충무공 김시민 장군상의 웅장한 기세에 마음이 든든하다.

임진왜란 일어나기 10년황금포카성
전쯤 율곡 이이가 '경장(개혁)하자. 10만 군사를 양성하자'라고 주장하였으나, '때에 맞지 않다. 군사 양성은 화를 키울 수 있다'라는 조정의 반대가 우세하였다. 율곡 이이가 '서얼을 허통하자, 노비를 면천하자'라고 했으나 역시 성리학에 심취한 관료와 선비들이 반대했다.
1589년, 전라도 전주와 진안을 중심으로 정여립은 대동계를 조직안철수연구소 주식
해 양반과 상민 계급의 벽을 허물고 함께 말 타고 활을 쏘았다. 정여립은 율곡 이이의 '서얼 허통, 노비 면천, 십만 양병' 등 개혁적인 주장을 스스로 실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정여립을 모반의 혐의로 제거하고, 천여 명의 선비들을 숙청했다. 이것은 개혁에 대한 조선 조정의 명확한 거부 선언이며 행동이었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일본군의 파죽지세에 조선은 풍전등화였다. 한양을 빼앗기고 선조가 의주로 몽진한 사이에 호남(전라도)을 제외한 조선 7도가 일본군에게 짓밟혔다.










▲  진주성 우물


ⓒ 이완우




진주성 우물. 큼직한 석재로 우물 정(井) 글자 형태로 우물의 난간을 지어 올렸다. 진주성에는 세 개 이상의 우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높은 지역에 맑은 샘물이 출렁인다니 새로웠다.


국난의 시기에 구국의 영웅이 출현한다. 일본군은 조선 팔도 중에 마지막 남은 전라도를 점령하고자 했다. 그러나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이 여러 차례 해전에서 승리하며 전라도 바닷길 길목을 굳게 막고 있었다. 1592년 7월, 육지에서 황진 장군이 웅치와 이치에서 전라도 고갯길 길목을 지켰다.










▲  진주성 남강의 풍경


ⓒ 이완우




진주성 남강의 풍경. 진주성의 남쪽은 아래로 남강이 흐르는 수직 절벽이다. 절벽이 천연의 성채를 이루고, 너른 남강은 천연 해자이다. 진주성은 천혜 요새였다. 예로부터 진주성의 남쪽 수직 절벽을 곧을 직(直) 글자로 표현했나 보다. 남강을 따라 수직 절벽이 첩첩 계속된다. 직(直) 글자 셋을 겹치면 '우뚝 솟을 촉 矗' 자가 된다. 진주성의 남강 따라 이어진 절벽은 촉석(矗石)이었다.

일본군은 1592년 10월에 다시 전라도를 점령하기 위해 진주성을 공격했다. 3만 명의 일본군이 진주성으로 침공하자, 김시민 진주 목사는 3800여 명의 병력과 함께 성을 사수하며 6일간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김시민 장군은 전투 중 상처를 입고 전사했지만, 조선군은 일본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진주성을 지켰다.

명나라와 일본군의 휴전 협상이 시작되었다. 도요토미는 조선 침략이 실패로 돌아간다고 여겼다. 도요토미의 휴전 조건은 한양 이남 땅을 일본에 할양 하라는 것이었다. 도요토미는 일본군 10만 병력을 총동원하여, 진주성 재차 공격을 명령한다. 제2차 진주성 전투는 1593년 6월 22일부터 6월 29일까지 벌어졌다.










▲  진주성 촉석루


ⓒ 이완우




진주성 촉석루. 영남 제일의 누정으로 남장대, 장원루라고도 부른다. 촉석루와 남강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에서 국난을 이겨낸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백일홍의 붉은 꽃망울이 진주성에 머무는 호국 충혼의 단심(丹心)으로 보였다. 촉석루 아래 남강 변에 의암이 있고, 촉석루의 동편에 진주성 동문인 촉석문이 있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조선군의 총사령관인 도원수 권율은 1만의 군사가 있었지만 참여하지 않는다. 의병장 곽재우도 이 전투를 외면하였다. 이때 유성룡은 1593년 1월부터 호서·호남·영남 삼도순찰사였다. 그는 이 전투를 총괄하며 지원해야 했으나 끝내 진주성에 나타나지 않았다. 제2차 진주성 전투 직전에 김천일 의병장의 부장인 양산숙이 명나라 제독 유정에게 명군의 진주성 전투 참여를 요청했다. 그러나 명군은 진주성을 외면하였다.
충청병마절도사인 황진은 진주성 방어전의 실질적인 총대장으로 6천명의 병력으로 9만5천 명의 일본군을 상대하며 전투를 지휘해 진주성을 8일 동안 당당하게 방어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조총 탄환에 이마를 맞고 순국했다. 황진이 순절하자 진주성도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제2차 진주성 전투는 싸움에서는 중과부적으로 졌지만, 전쟁에서는 결국 승리하는 계기가 된 전투였다. 이 전투 이전까지 1년 2개월 기간 일본군은 10만 명(전체 병력의 44%) 이상이 전사했다고 한다. 이 진주성 2차 전투에서 일본군은 3만 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여 전쟁의 명분도 동력도 상실했다. 사실상 일본은 침략 전쟁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  진주성 서장대


ⓒ 이완우




진주성 서장대(西將臺). 남강을 따르는 진주성 남쪽 절벽의 서쪽 끝 높은 위치의 누정이다. 진주성 서문(西門)이며, 회룡루(回龍樓)라고도 했다. 서장대 아래의 남강 절벽은 남강으로 제법 큰 개울이 합류하는 두물머리 위치로 강물이 돌아가는 듯이 보여 회룡(回龍)이라는 지명이 생길만하다. 남강 절벽에 높이 세찬 바람을 맞으며 군진의 깃발을 휘날리는 진주성의 서장대는 우뚝 솟아 있었다.


서장대 아래의 호국사(護國寺)는 고려 말에 성내의 사찰이라는 의미의 내성사(內城寺)였다. 잦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진주성을 보수하고 승병을 양성하던 사찰이었다. 임진왜란 때 순국한 호국 충혼의 넋을 기리며 '호국사'로 이름을 바꿨다.










▲  진주성 창렬사


ⓒ 이완우




진주성 창렬사(彰烈祠). 서장대 성벽 아래의 호국사 옆에 있는 사당이다. 이곳 진주성 1차, 2차 전투에서 순국한 김시민, 황진, 서예원, 김천일, 양산숙, 최경회 등 서른아홉 분의 충절을 모시고 있다. 정사(正祠)에 7위, 동사(東祠)에 15위, 서사(西祠)에 17위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 전개의 실황과 전투 기록으로만 이해할 일이 아니다. 일본은 1590년 백 년에 걸친 전국시대를 마감하며 전국(全國)을 통일하였다. 1591년 일본은 조선 출병을 선언하고, 1592년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미증유의 국난으로 국토가 유린 당하고 조선 백성은 참화에 시달렸다. 전쟁 전에 조선 백성 총 인구는 416만 명으로 추정한다. 이 전쟁으로 조선 백성의 약 60%인 252만 명이 일본군에 살해되거나 전쟁으로 인한 기근과 역병으로 사망하였다.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임진왜란










▲  진주성 국립진주박물관. 조선 장인의 자취가 담긴 장식 백자. 일본 규슈 사가현 아리타 지역에 강제로 끌려간 조선의 사기장들이 만든 도자기.


ⓒ 이완우




진주성 국립진주박물관. 천자총통, 지자총통, 중완구, 비격진천뢰 등 임진왜란 당시 사용된 다양한 조선군의 무기가 분류되어 진열되어 있다. 1923년 진주에서 시작한 형평사 운동의 자료를 잘 살펴보았다. 1862년 진주 농민항쟁의 기록이나 유물을 찾아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조선 장인의 자취가 담긴 일본 장식 백자. 세 점의 백자 앞에서 쉽게 떠날 수 없었다. 일본 규슈 사가현 아리타 지역에서 만들어진 도자기였다. 아리타 지역은 임진왜란 때 일본에 강제로 끌려간 조선의 사기장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대표적인 곳이다.
임진왜란을 우리나라 밖에서는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한다. 일본의 사쓰마 번(가고시마)을 중심으로 조선 도공이 생산한 도자기는 유럽 시장에 비싸게 팔렸다. 어떤 학자는 일본 사쓰마 번의 도자기 산업이 일본의 근대화를 추진한 경제적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이 당시 일본에 포로로 잡혀간 조선 백성은 약 10만 명이 된다고 하는데, 돌아온 백성은 몇천 명도 되지 않는다. 일본은 끌고 간 조선 백성을 유럽의 노예 시장에 헐값에 팔기도 하였다.










▲  진주성 임진대첩계사순의단


ⓒ 이완우




진주성 임진대첩계사순의단. 촉석루를 아래로 내려다보는 높은 위치에 있다. 이곳은 1592년 진주대첩과 1593년 진주성 제2차 전투에서 순국한 백성, 관리, 의병, 장병의 넋을 추모하는 제단이다. 제단 둘레에 진주성 전투의 역사적 내역과 두 해에 걸친 진주성 전투의 경과를 기술해 놓았다. 진주성 2차 항전. 싸움은 졌어도 전쟁은 이긴 당당한 전투였다.


진주성은 풍전등화의 위태로운 나라를 구해낸 충절의 민족혼이 살아 있었다. 과거의 역사는 잊지 않는 한 풍화되지 않으며, 생생한 현실의 교훈으로 되살아난다. 전쟁이 일어난 후 용감히 싸우는 헌신과 충성심은 훌륭하다. 그러나 유비무환의 지혜로 전쟁을 미리 방비 하는 실천과 개혁은 더욱 필요하다. 호국의 성지 진주성이 주는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며 진주성 역사 탐방을 마무리하였다.










▲  진주성과 남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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