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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어따 아지난달 초 제주에서 열린 빌리온소울하비스트(BSH) 국제대회에서 복음주의와 오순절주의, 은사주의를 포함한 전 세계 기독교 리더들이 마지막 추수를 위해 하나 되어 사역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황성주 회장 제공
이번 아프리카 일정 중 필자는 세계 최빈국인 말라위에서 뜻하지 않게 로뎀나무 같은 숙소를 이용할 수 있었다. 사막보다 더 사막 같은 고요함이 있는 임재의 공간에서 일주일을 조용히 지냈다. 필자에게 쉼은 익숙지 않다. 항상 예수님의 두 번째 시험 ‘돌로 떡이 되게 하는 유용성(relevance)’에 신경이 쓰인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는 골드몽사이트 유혹은 안식을 빼앗아 간다. 특히 동역자들을 평가할 때 ‘유용성 편견’이 시야를 흐리게 한다.
필자가 말라위에 온 다음 날 리빙스톤이 발견했다는 말라위 호수를 방문했다. 가는 도중 살리마라는 지역에서 우연히 한 선교사를 만났는데 그는 선교계에서 필자를 힘들 게 했던 기억이 있어 매우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곰곰이 은혜의 렌즈를 가동해 보니 신천지릴게임 그분은 ‘혁신의 걸림돌’이 아니라 내가 가진 ‘유용성 편견의 피해자’였다. 주님의 빛 아래 필자의 연약함을 처절하게 돌아본 순간이었다.
서로는 서로에게 스승
라르쉬공동체는 지적장애인 형제들이 함께 살면서 공동체를 이룬 곳으로 영성 바다이야기다운로드 학자 헨리 나우웬을 통해 유명해졌다. 그가 체험한 라르쉬는 능력 있는 이들이 약한 이들을 돌보는 기관이 아니라, 장애우와 비장애우가 서로 의존하고 상호성을 배우는 영적 가족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성경이 말하는 파워는 약함을 드러낼 수 있게 해주는 힘, 실패와 상처를 숨기지 않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안전함, 서로의 연약함을 통해 함께 성장하게 하는 상호성의 오리지널바다이야기 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 역시 모두 연약함이 있고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는 서로에게 스승’이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이 말하는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고전 12:22)라는 표현은 매우 의미 심장하다.
인체 장기 중 뇌하수체(pituitary gland)는 시상하부 바로 아래, 뇌 바 쿨사이다릴게임 닥에 위치한 작은 내분비샘이다. 크기는 약 1㎝, 무게는 약 0.5g 정도에 불과하다. 그래서 의대 본과 1학년 신경해부학 시간에 학생들은 이를 쉽게 찾지 못해 애를 먹는다. 그런데 이 뇌하수체는 인체 내분비계의 총지휘자로, 여러 말초 내분비샘(갑상선 부신 성선 등)을 조절해 성장·대사·생식·체액 균형을 통합 관리하는 핵심 기관이다. 의학적으로는 작은 기관이 전신의 기능을 좌우한다는 점에서 임상 현장에서는 전신 증상이 있을 때 뇌하수체 질환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뇌하수체는 ‘작지만 몸 전체를 조율하는 지휘자’라는 상징성 때문에 리더십 이론에서는 통합적 조정 기능으로 비유된다.
사도 바울은 뵈뵈라는 여성을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롬 16:2)라고 불렀다. 뵈뵈는 단순 후원자가 아니라 로마서를 직접 전달하고 추천을 받는 위치에 있을 정도로, 바울 사역 전체의 흐름과 사역에 깊이 관여한 무대 뒤 숨은 조정자이다. 이는 여러 시스템을 동시에 조율하는 뇌하수체의 기능과 가장 유사하다. 뵈뵈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재정·환대·행정·연결 기능을 통해 바울 사역의 네트워크와 교회들의 사역적 균형을 유지하는 핵심 허브 역할을 했다.
빌립보의 루디아는 재정과 공간 제공, 환대에 강점이 있는 인물로, 풍부한 영양과 산소 공급을 담당하는 순환기에 가까운 면이 있다. 브리스길라는 성경 해석, 교육, 멘토링이라는 특정한 기능을 가진 국소 내분비샘에 가깝다. 두기고는 정보 제공, 위로, 서신 전달의 역할을 하는 신경계의 역할로 몸 전체에 신호를 전하는 통신망 이미지가 강하다. 베드로와 바울, 요한과 야고보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뵈뵈와 루디아, 브리스길라와 두기고도 중요하다.
그래서 성경은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 : 2~3)라고 권면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서로가 서로에게 중요하고 반드시 하나 돼야만 정상 기능을 유지할 수 있다.
누가 더 주님을 사랑하는가
애석하게도 한국교회 내부를 들여다보면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연합(Great Unity)에 앞서 내부의 불신과 긴장을 넘어 절망이라고 하는 깊은 골짜기를 마주하게 된다. 사실 복음주의 진영은 성경의 무오성, 십자가 대속, 개인적 회심, 복음전도와 제자화, 세계선교를 강조하며 지난 한 세대 동안 세계 복음화의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 그리고 오순절주의 진영은 성령충만, 방언, 치유, 능력 있는 증언을 통해 복음의 생동감과 기쁨을 되살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은사주의 역시 기존 전통을 넘어, 성령의 은사와 임재를 새롭게 사모하게 하며 예배와 기도의 회복에 불을 붙였다.
문제는 세 흐름이 한 몸의 지체가 아니라 서로를 향해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를 보낸다는 것이다. 복음주의는 오순절과 은사주의를 향해 “감정적이다, 신비주의다” 하며 경계하고, 오순절주의는 복음주의를 “머리는 크지만 능력이 없다”고 비판한다. 일부 은사주의 그룹을 향해서는 “신사도운동이니 곧 이단”이라며 통째로 묶어 버리는 극단이 존재하고 있다.
물론 영적 분별은 필요하다. 신학적·성경적 균형을 벗어난 과도한 ‘사도직 주장’이나 지도자 우상화, 개인의 체험을 성경 말씀의 권위보다 앞세우는 행태에 대해서는 명백히 경계해야 한다. 동시에 한 가지 위험도 역시 경계해야 하는데 정통이라는 이름으로 ‘부분적 진리와 편견’을 합리화하는 것이다. 즉 성령의 역사 전체를 몇몇 과격한 사례에 끼워 맞춰 이단시화 하는 태도는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항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반대로 은사와 체험을 강조하는 쪽에서는 복음주의의 신학적 깊이와 성경해석의 전통을 “차갑다, 메마르다”는 식으로 가볍게 치부하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지금 복음주의 오순절주의 은사주의 모두에게 공통된 결론은 성경적 제자화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이다. 복음주의는 신학적 교리와 설교는 탁월하지만, 성도들의 메마른 삶과 거룩한 일상의 부재가 문제이다. 오순절주의는 성령의 능력과 기도의 열정, 전도의 불씨는 강하지만, 견고한 말씀의 기초와 균형 잡힌 신학의 결여로 쉽게 불꽃이 타오르다가 사그라지기 쉽다. 은사주의는 예배의 생동감과 공동체의 친밀함을 회복했지만 체험에 대한 목마름이 십자가의 길과 순종의 훈련을 압도하면서 결국 또 다른 형태의 ‘값싼 은혜’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결론적으로 복음주의는 오순절·은사주의로부터 ‘살아 있는 성령의 불과 기도의 열정’을 배워야 하고, 오순절·은사주의는 복음주의로부터 ‘견고한 말씀의 기초와 신학적 검증의 렌즈’를 배워야 한다. 그리고 셋 다 진리의 말씀 앞에 서서 실제 삶의 루틴과 구조를 바꾸는 성경적 제자도의 깊이를 공동 과제로 삼아야 한다. 결국 문제는 누가 더 성경적인가의 논쟁이 아니라 ‘누가 더 주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고 있는가’의 명제를 놓고 선의의 싸움을 싸워야 한다.
케냐의 청년 사역 리더들로 이들은 교회를 떠난 사람과 구도자를 위한 새로운 형태의 교회를 구상하고 있다. 황성주 회장 제공
정죄할 때가 아니라 하나 될 때
개인적으로 ‘신사도운동’이라는 단어가 무분별하게 사용되는 것을 볼 때 큰 안타까움을 느낀다. 특정 지도자를 무비판적으로 ‘사도’로 추앙하며 성경보다 인간의 메시지를 더 권위 있게 다루고, 윤리와 성경의 기초가 무너진 집단에 대해서는 단호히 선을 긋는 게 마땅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 용어가 사용되는 방식이다. 조금만 은사를 강조하거나 조금만 성령의 불을 사모해도, 또 조금만 기적과 치유를 기대해도, ‘저건 신사도야, 위험해’ 하는 식으로 쉽게 낙인을 찍어 버린다면 정작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권능과 은사를 함께 잘라내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그런 낙인 찍기에 앞서 먼저 정중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 공동체가 복음을 온전히 전하고 있는가’ ‘회개와 십자가, 부활과 제자도를 분명히 가르치는가’ ‘성도들의 삶에서 거룩함과 성결, 사랑과 공의의 열매가 나타나는가’를 묻고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오늘날 복음주의 오순절주의 은사주의 어느 진영도 이 기준 앞에서 완벽하게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에서 셋 다 성경적 제자화가 절실히 필요하고 판단된다.
결국 성삼위 하나님께서는 복음주의만 사용하시지 않는다. 물론 오순절주의나 은사주의만 사용하시지도 않는다. 복음주의의 말씀의 깊이, 오순절주의의 기도와 능력의 열정, 은사주의의 예배와 공동체의 생동감을 다 사용하신다. 이제는 서로를 이단시화 하기보다 각 진영이 가진 강점과 약점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우리 모두 ‘복음 앞에 성경적 제자도로 부름받은 사람들’임을 고백해야 할 때이다.
지금 우리는 마지막 대추수와 다층적, 전면적 영적 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다. 지금 복음은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지구촌 전역에 넓게 퍼져 있고, 동시에 절대진리를 조롱하는 문화도 어느 때보다 교묘하고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다. 개인과 교회 차원, 도시·문화·문명 차원에서 이 모든 전투가 한꺼번에 벌어지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여전히 옳고 그름의 잣대를 서로에게 겨누며 적진 한가운데서 ‘아군끼리’ 피를 흘리고 있는 형국이다. 사실 마지막 대추수의 가장 큰 장애물은 적전분열이다.
사탄의 가장 중요한 전략 중 하나는 ‘적군과 아군의 경계를 흐리게 하여 아군끼리 싸우게 하는 것’인데 지금 우리는 이 함정에 빠져 있다. 서로의 작은 차이를 확대해 진영 논리와 교단 분열, 세대 전쟁으로 몰아가고 있다. 서로 하나가 돼야 할 상황에 ‘내가 더 옳다’ ‘내가 더 순수하다’며 자기 의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 선교 현장을 방문하며 느끼는 것은 세 진영이 하나되기만 한다면, 그리고 각 진영의 약점이 보완되기만 한다면 복음의 현장에 폭발적인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 눈에 선명히 보인다는 점이다. 하지만 적전분열의 상태에서는 아무리 많은 사역을 해도 그물망이 찢어진다. 이제 거대한 복음의 그물망을 쳐야 한다. 결론적으로 세 진영의 연합(Great Unity)을 통한 상승효과만이 마지막 대추수(Final Harvest)를 위한 거의 유일한 전략이다. 이제 복음을 위해 서로를 포용해야 한다. 하나가 돼야 한다.
빌리온소울하비스트(BSH)는 이러한 관점에서 로마가톨릭과 정교회의 재복음화뿐만 아니라, 복음주의 오순절주의 은사주의 내부의 성경적 제자화까지 포함하는 진정한 영적 대각성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주님, 우리가 복음주의, 오순절주의, 은사주의라는 이름 앞에 서기 전에 먼저 말씀의 본질로 돌아가 그리스도의 제자로 서게 하소서. 이제 적전분열을 멈추고 한 성령 안에서 영혼 구원의 사명에 헌신하게 하옵소서. 거룩한 하나됨을 통해 영적 대각성과 거룩한 부흥의 불꽃이 다시 타오르게 하옵소서.”
황성주 KWMA 회장·사랑의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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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아프리카 일정 중 필자는 세계 최빈국인 말라위에서 뜻하지 않게 로뎀나무 같은 숙소를 이용할 수 있었다. 사막보다 더 사막 같은 고요함이 있는 임재의 공간에서 일주일을 조용히 지냈다. 필자에게 쉼은 익숙지 않다. 항상 예수님의 두 번째 시험 ‘돌로 떡이 되게 하는 유용성(relevance)’에 신경이 쓰인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는 골드몽사이트 유혹은 안식을 빼앗아 간다. 특히 동역자들을 평가할 때 ‘유용성 편견’이 시야를 흐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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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성경은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 : 2~3)라고 권면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서로가 서로에게 중요하고 반드시 하나 돼야만 정상 기능을 유지할 수 있다.
누가 더 주님을 사랑하는가
애석하게도 한국교회 내부를 들여다보면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연합(Great Unity)에 앞서 내부의 불신과 긴장을 넘어 절망이라고 하는 깊은 골짜기를 마주하게 된다. 사실 복음주의 진영은 성경의 무오성, 십자가 대속, 개인적 회심, 복음전도와 제자화, 세계선교를 강조하며 지난 한 세대 동안 세계 복음화의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 그리고 오순절주의 진영은 성령충만, 방언, 치유, 능력 있는 증언을 통해 복음의 생동감과 기쁨을 되살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은사주의 역시 기존 전통을 넘어, 성령의 은사와 임재를 새롭게 사모하게 하며 예배와 기도의 회복에 불을 붙였다.
문제는 세 흐름이 한 몸의 지체가 아니라 서로를 향해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를 보낸다는 것이다. 복음주의는 오순절과 은사주의를 향해 “감정적이다, 신비주의다” 하며 경계하고, 오순절주의는 복음주의를 “머리는 크지만 능력이 없다”고 비판한다. 일부 은사주의 그룹을 향해서는 “신사도운동이니 곧 이단”이라며 통째로 묶어 버리는 극단이 존재하고 있다.
물론 영적 분별은 필요하다. 신학적·성경적 균형을 벗어난 과도한 ‘사도직 주장’이나 지도자 우상화, 개인의 체험을 성경 말씀의 권위보다 앞세우는 행태에 대해서는 명백히 경계해야 한다. 동시에 한 가지 위험도 역시 경계해야 하는데 정통이라는 이름으로 ‘부분적 진리와 편견’을 합리화하는 것이다. 즉 성령의 역사 전체를 몇몇 과격한 사례에 끼워 맞춰 이단시화 하는 태도는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항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반대로 은사와 체험을 강조하는 쪽에서는 복음주의의 신학적 깊이와 성경해석의 전통을 “차갑다, 메마르다”는 식으로 가볍게 치부하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지금 복음주의 오순절주의 은사주의 모두에게 공통된 결론은 성경적 제자화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이다. 복음주의는 신학적 교리와 설교는 탁월하지만, 성도들의 메마른 삶과 거룩한 일상의 부재가 문제이다. 오순절주의는 성령의 능력과 기도의 열정, 전도의 불씨는 강하지만, 견고한 말씀의 기초와 균형 잡힌 신학의 결여로 쉽게 불꽃이 타오르다가 사그라지기 쉽다. 은사주의는 예배의 생동감과 공동체의 친밀함을 회복했지만 체험에 대한 목마름이 십자가의 길과 순종의 훈련을 압도하면서 결국 또 다른 형태의 ‘값싼 은혜’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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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죄할 때가 아니라 하나 될 때
개인적으로 ‘신사도운동’이라는 단어가 무분별하게 사용되는 것을 볼 때 큰 안타까움을 느낀다. 특정 지도자를 무비판적으로 ‘사도’로 추앙하며 성경보다 인간의 메시지를 더 권위 있게 다루고, 윤리와 성경의 기초가 무너진 집단에 대해서는 단호히 선을 긋는 게 마땅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 용어가 사용되는 방식이다. 조금만 은사를 강조하거나 조금만 성령의 불을 사모해도, 또 조금만 기적과 치유를 기대해도, ‘저건 신사도야, 위험해’ 하는 식으로 쉽게 낙인을 찍어 버린다면 정작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권능과 은사를 함께 잘라내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그런 낙인 찍기에 앞서 먼저 정중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 공동체가 복음을 온전히 전하고 있는가’ ‘회개와 십자가, 부활과 제자도를 분명히 가르치는가’ ‘성도들의 삶에서 거룩함과 성결, 사랑과 공의의 열매가 나타나는가’를 묻고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오늘날 복음주의 오순절주의 은사주의 어느 진영도 이 기준 앞에서 완벽하게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에서 셋 다 성경적 제자화가 절실히 필요하고 판단된다.
결국 성삼위 하나님께서는 복음주의만 사용하시지 않는다. 물론 오순절주의나 은사주의만 사용하시지도 않는다. 복음주의의 말씀의 깊이, 오순절주의의 기도와 능력의 열정, 은사주의의 예배와 공동체의 생동감을 다 사용하신다. 이제는 서로를 이단시화 하기보다 각 진영이 가진 강점과 약점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우리 모두 ‘복음 앞에 성경적 제자도로 부름받은 사람들’임을 고백해야 할 때이다.
지금 우리는 마지막 대추수와 다층적, 전면적 영적 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다. 지금 복음은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지구촌 전역에 넓게 퍼져 있고, 동시에 절대진리를 조롱하는 문화도 어느 때보다 교묘하고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다. 개인과 교회 차원, 도시·문화·문명 차원에서 이 모든 전투가 한꺼번에 벌어지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여전히 옳고 그름의 잣대를 서로에게 겨누며 적진 한가운데서 ‘아군끼리’ 피를 흘리고 있는 형국이다. 사실 마지막 대추수의 가장 큰 장애물은 적전분열이다.
사탄의 가장 중요한 전략 중 하나는 ‘적군과 아군의 경계를 흐리게 하여 아군끼리 싸우게 하는 것’인데 지금 우리는 이 함정에 빠져 있다. 서로의 작은 차이를 확대해 진영 논리와 교단 분열, 세대 전쟁으로 몰아가고 있다. 서로 하나가 돼야 할 상황에 ‘내가 더 옳다’ ‘내가 더 순수하다’며 자기 의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 선교 현장을 방문하며 느끼는 것은 세 진영이 하나되기만 한다면, 그리고 각 진영의 약점이 보완되기만 한다면 복음의 현장에 폭발적인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 눈에 선명히 보인다는 점이다. 하지만 적전분열의 상태에서는 아무리 많은 사역을 해도 그물망이 찢어진다. 이제 거대한 복음의 그물망을 쳐야 한다. 결론적으로 세 진영의 연합(Great Unity)을 통한 상승효과만이 마지막 대추수(Final Harvest)를 위한 거의 유일한 전략이다. 이제 복음을 위해 서로를 포용해야 한다. 하나가 돼야 한다.
빌리온소울하비스트(BSH)는 이러한 관점에서 로마가톨릭과 정교회의 재복음화뿐만 아니라, 복음주의 오순절주의 은사주의 내부의 성경적 제자화까지 포함하는 진정한 영적 대각성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주님, 우리가 복음주의, 오순절주의, 은사주의라는 이름 앞에 서기 전에 먼저 말씀의 본질로 돌아가 그리스도의 제자로 서게 하소서. 이제 적전분열을 멈추고 한 성령 안에서 영혼 구원의 사명에 헌신하게 하옵소서. 거룩한 하나됨을 통해 영적 대각성과 거룩한 부흥의 불꽃이 다시 타오르게 하옵소서.”
황성주 KWMA 회장·사랑의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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