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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는 상태는? 잠깐씩 판이하게 사람을 닦고 배의 기자 admin@reelnara.info‘삼청도도(三淸滔滔)―매·죽·난, 멈추지 않는 이야기’ 1부 전시장에 전면이 공개된 ‘삼청첩’의 일부인 이정의 ‘신죽’. 검게 물들인 비단에 금니로 그렸다. 대구간송미술관 제공
1882년 7월 조선의 구식 군대 군인들이 조정에 맞서 봉기를 일으킨다. 일본군을 본보기로 창설한 신식 군대보다 열악한 차별 대우를 받는 데 분노해 일본 교관들을 죽이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했다. 한반도를 청과 일본의 외세 싸움터로 만든 단초가 된 임오군란의 시작이다. 일본 정부는 조선 군인들한테 증오의 대상이던 일본 거류민들을 지 야마토릴게임 킨다는 구실로 군함 4척을 파견한다. 인천에 들어와 임진왜란 이후 처음 일본군을 상륙시키며 침탈 교두보를 놓은 이 군함들 가운데 닛신(일진)호가 있었는데, 이 배 함장이던 해군 장교 쓰보이 고조(1843~1898)의 행적이 기구하게도 이 땅의 미술사에 얼룩처럼 남게 된다. 인천에서 경비 업무를 하던 그가 경성(서울)에 출장 와서 경희궁 근처 일본 영사관에 바다이야기비밀코드 잠시 머물다 조선 문인들이 추앙해온 희대의 그림 명작을 사들였다는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이 작품은 조선시대 묵죽화 최고 거장으로 꼽히는 대화가 탄은 이정(1554~1626)이 임진왜란 시기 비분강개하며 만든 시화모음집 ‘삼청첩’(三淸帖)이었다. ‘어우야담’을 쓴 16세기 문인 유몽인이 ‘시대의 보물’(일세지보)이라고 찬탄했던 체리마스터pc용다운로드 최고의 문인화·글씨 컬렉션이 아닌가.
‘삼청첩’ 45면의 첨서 부분. 17세기 정치가로 서인 세력의 영수였던 송시열(1607~1689)이 ‘삼청첩’을 살펴보고 적은 기록인 ‘삼청첩발’의 마지막 부분이다. 병자호란 전란에도 첩의 이정 그림을 무사히 지켜낸 소장자 무하공(홍주원 바다이야기사이트 )의 공덕을 칭송하면서 그림 내력을 적은 내용이다. 기구하게도, 글 사이와 마무리 부분에 구한말 조선을 침탈한 일본 해군 장교가 삼청첩을 얻은 경위를 또박또박 적은 기록이 끼워지거나 덧붙여져 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인천에 들어온 일본 침략선 일진함 함장 쓰보이 고조가 쓴 것으로 당시 한양(서울)의 일본 공사관에 머물던 중 첩을 입수했다는 내용을 적 릴게임갓 어놓았다. 대구간송미술관 제공
세종대왕의 현손으로, 젊을 적부터 대나무 그림의 대가로 이름 높았던 탄은은 1592년 왜란 발발 뒤 왜군 칼에 맞아 화가의 생명이라 할 오른팔이 끊어질 정도의 중상을 입고 충청도 공주로 피신한다. 현지에서 절치부심하며 몸을 추스린 그는 성치 않은 팔을 움직여 흑비단에 금물로 칠한 12폭의 대나무 그림과 난초·대나무가 어우러진 그림 1폭, 난초 그림 3폭, 매화 그림 4폭을 그렸다. 모두 20면의 그림에다 전란의 감회와 나라에 대한 걱정, 망향의 회한 등을 녹인 자작한시 20수를 더해 1594년 12월 40살에 시화첩 ‘삼청’을 완성한다. 첩을 보고 감격한 당대와 후대의 문인들은 탄은의 그림과 한시 앞뒤로 발문인 제발과 감상평, 찬시 등을 줄줄이 남겼다. 첩은 가로 39.3㎝, 세로 25.5㎝의 아담한 크기지만, 16~17세기 최고 문장가 최립이 서문을 짓고 천자문으로 유명한 명필 한석봉이 글씨로 옮겨쓰니 당대 글과 글씨, 그림의 최고 대가인 ‘삼절’의 작품들이 집약된 셈이었다. 여기에 17세기 명필인 유학자 송준길은 ‘세가지 맑음’을 뜻하는 ‘삼청첩’ 표지 글씨를 썼고, 이후로도 송시열, 차천로, 이안눌, 유근 등 17~18세기 최고 문인들의 찬문들이 이어지는 전무후무한 내력의 시서화 보고가 200여년 동안 차곡차곡 쌓여 이루어졌다.
예사롭지 않은 작품첩임을 직감했는지, 쓰보이는 첩 뒷부분에 꼼꼼한 필체로 입수 기록을 적었다. ‘메이지15년(1882) 겨울 조선 경성에서 이 책을 구입했다’로 시작하는 그의 친필은 ‘삼청첩’ 45면에 보인다. 17세기 유학자로 서인 정치 세력의 영수였던 송시열(1607~1689)이 ‘삼청첩’을 감상하고 적은 기록인 ‘삼청첩발’의 문장들 중간 사이와 마지막 대목 다음에 자신의 글을 나눠 적은 것이다. ‘삼청첩발’은 병자호란 전란기 모든 가산이 불타는 참화 속에서도 탄은의 ‘삼청첩’을 지켜냈던 당대 소장자 무하공 홍주원(1606~1672)의 공덕을 칭송한 소장 내력기다. 왜군이 침략한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태어난 명작을 전란 발발 290년 만에 다시 조선을 침탈한 일본의 군인이 손에 넣고 입수 내력을 송시열의 찬문 텍스트에 기고만장한 모양새로 덧붙였으니 기막힌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쓰보이는 ‘삼청첩 원본에 나온 제작 시기는 우리(일본)의 조선 정벌(임진왜란) 중 화의가 진행되던 시기였다’고 한자와 가타카나를 섞은 글씨들로 의기양양하게 적어놓았다.
‘삼청도도(三淸滔滔)―매·죽·난, 멈추지 않는 이야기’ 1부 전시장에 56면 전면이 공개된 ‘삼청첩’의 표지와 앞부분 그림들. 대구간송미술관 제공
탄은의 명품 시화첩 ‘삼청첩’의 탄생과 전래에 얽힌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지난 9월부터 지난 21일까지 대구간송미술관에서 열렸던 기획전 ‘삼청도도(三淸滔滔)―매·죽·난, 멈추지 않는 이야기’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삼청첩’은 사상 처음 빈 공지와 훼손 부분까지 포함한 화첩 56면 전체가 공개돼 올곧은 필력과 후대 소장자들이 보관과 전래를 위해 헌신한 자취들을 일러주었다. 핵심인 20면의 대나무, 난초, 매화 그림들은 특유의 꼿꼿하고 유려한 필선으로 묘사되는데, 전란의 역경에 굽히지 않은 의기로 충만하다. 난초 잎새와 대줄기, 댓잎의 사실적인 사생력과 절제된 필치, 매화 꽃대와 둥치의 색다른 구도 등이 돋보이는 첩의 그림들은 조선풍 묵죽매 그림의 기틀을 세웠다고 평가받는다.
이 명작 시화첩의 드높은 인문적 가치는 작품을 전란 속에서 지키며 길이 전하려 한 소장자들의 충심에서 우러나온다고 할 수 있다. 첩의 37~42면에 윤신지(1582~1657)가 적은 내력글 ‘삼청첩발’을 보면, 탄은이 세상을 떠난 뒤 첩은 선조의 부마인 홍주원의 수중으로 들어간다. 병자호란 당시 그는 피난한 인조를 수행하고, 집안 식구들은 ‘삼청첩’을 들고 강화도로 피신하지만, 섬에 들어온 청군의 방화로 피난 집은 불타버린다. 이후 잿더미 속에서 발견된 ‘삼청첩’은 한호의 서문 글씨와 탄은의 시문 일부만 타거나 그을렸을 뿐 그림들은 무사했다. 기적적으로 병화를 피한 것이다.
‘삼청도도(三淸滔滔)―매·죽·난, 멈추지 않는 이야기’ 1부 전시장에 나온 이정의 ‘삼청첩’ 전면들 가운데 일부인 ‘난죽’. 대구간송미술관 제공
실제로 전시장에서는 불탄 흔적이 그대로 남은 한호의 서문 글씨(2면)와 탄은 한시첩들(29~35면)이 나와 옛 참화를 짐작할 수 있었다. 홍주원과 동서 사이였던 윤신지는 글에 당시 상황을 적어놓았다. ‘오직 이 첩 하나만이 잿더미 속에 떨어져 있었는데, …불길이 미쳐 …석봉의 글씨첩을 절반쯤 태웠지만, 대나무 그림에 이르러서는 불이 저절로 꺼져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늘이 아끼고 귀신이 보호하여 신물(神物)이 훼손되지 않았으니, 아! 공경할 만한 일이다.’
이후 ‘삼청첩’은 홍주원의 후손들이 가문의 명예를 빛내는 가보로 여겨 7대에 걸쳐 간직했으나, 임오군란 때 쓰보이에게 넘어가면서 일본을 떠도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1929년 도쿄미술구락부 경매 뒤엔 소유자가 변호사 하리마 류조로 바뀌면서 이역살이는 50년 이상 이어졌다. 첩을 고국에 돌아오게 한 구원자는 일제강점기 유출될 뻔한 문화유산들을 지킨 대수장가 간송 전형필(1906∼1962)이었다. 문화로 나라를 구한다는 신념을 지녔던 간송은 1935년, 일본 소유자 쪽과 흥정한 끝에 당시 서울 기와집 반채 값인 455원을 건네고 첩을 다시 조선으로 가져온다. 그렇게 ‘삼청첩’은 간송컬렉션의 일원으로 귀환했고, 이 땅 우국지사의 예술을 대표하는 절대 명품으로 남게 됐다.
‘삼청도도(三淸滔滔)―매·죽·난, 멈추지 않는 이야기’ 2부 전시장. 안쪽 한가운데 공간에 탄은의 ‘풍죽’을 내건 가운데 양옆으로 바람결에 흔들리는 대나무의 동영상이 ‘쏴’ 하는 소리를 내면서 흘러간다. 대구간송미술관 제공
‘삼청첩’ 그림들의 압권은 대나무다. 대의 생태를 바람에 하늘거리는 ‘풍죽’, 다 큰 ‘성죽’, 늙은 ‘통죽’, 막 자란 죽순의 생기 머금은 ‘순죽’ 따위로 나누어 묘사했다. 탄은은 대각선 구도나 댓잎 줄기의 섬세한 묘사로 상징성과 파격성을 함께 전해준다. 붓질 한번에 모양새를 빚어내야 한다는 원칙에 얽매이지 않았다. 거듭 붓질하며 실체적 명암 표현을 드러낸 통죽의 자태와 굽이치는 대나무 줄기의 생명력 등을 전해준다. 지폐 5만원권에도 나오는 전시장 2부의 대작 ‘풍죽’과 더불어 어떤 시련에도 굽히지 않겠다는, 고결한 선비 정신의 고갱이를 접할 수 있다. 후대 소장자 홍주원이 불탄 한석봉 서문 글씨의 별도 친필본을 소유자였던 먼 친척에게 수시로 달라고 간청해 결국 입수하고 지금 전하는 모습으로 복원시켰다는 윤신지의 ‘첩발’ 기록만 봐도 첩의 온전한 보전을 위해 얼마나 간절한 정성을 들였는지도 실감하게 된다. 일본에 유출된 ‘삼청첩’을 간송이 눈여겨보고 사들인 것 또한 이 절세 보물의 귀향을 위한 필연이 아니었을까.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1882년 7월 조선의 구식 군대 군인들이 조정에 맞서 봉기를 일으킨다. 일본군을 본보기로 창설한 신식 군대보다 열악한 차별 대우를 받는 데 분노해 일본 교관들을 죽이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했다. 한반도를 청과 일본의 외세 싸움터로 만든 단초가 된 임오군란의 시작이다. 일본 정부는 조선 군인들한테 증오의 대상이던 일본 거류민들을 지 야마토릴게임 킨다는 구실로 군함 4척을 파견한다. 인천에 들어와 임진왜란 이후 처음 일본군을 상륙시키며 침탈 교두보를 놓은 이 군함들 가운데 닛신(일진)호가 있었는데, 이 배 함장이던 해군 장교 쓰보이 고조(1843~1898)의 행적이 기구하게도 이 땅의 미술사에 얼룩처럼 남게 된다. 인천에서 경비 업무를 하던 그가 경성(서울)에 출장 와서 경희궁 근처 일본 영사관에 바다이야기비밀코드 잠시 머물다 조선 문인들이 추앙해온 희대의 그림 명작을 사들였다는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이 작품은 조선시대 묵죽화 최고 거장으로 꼽히는 대화가 탄은 이정(1554~1626)이 임진왜란 시기 비분강개하며 만든 시화모음집 ‘삼청첩’(三淸帖)이었다. ‘어우야담’을 쓴 16세기 문인 유몽인이 ‘시대의 보물’(일세지보)이라고 찬탄했던 체리마스터pc용다운로드 최고의 문인화·글씨 컬렉션이 아닌가.
‘삼청첩’ 45면의 첨서 부분. 17세기 정치가로 서인 세력의 영수였던 송시열(1607~1689)이 ‘삼청첩’을 살펴보고 적은 기록인 ‘삼청첩발’의 마지막 부분이다. 병자호란 전란에도 첩의 이정 그림을 무사히 지켜낸 소장자 무하공(홍주원 바다이야기사이트 )의 공덕을 칭송하면서 그림 내력을 적은 내용이다. 기구하게도, 글 사이와 마무리 부분에 구한말 조선을 침탈한 일본 해군 장교가 삼청첩을 얻은 경위를 또박또박 적은 기록이 끼워지거나 덧붙여져 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인천에 들어온 일본 침략선 일진함 함장 쓰보이 고조가 쓴 것으로 당시 한양(서울)의 일본 공사관에 머물던 중 첩을 입수했다는 내용을 적 릴게임갓 어놓았다. 대구간송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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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사롭지 않은 작품첩임을 직감했는지, 쓰보이는 첩 뒷부분에 꼼꼼한 필체로 입수 기록을 적었다. ‘메이지15년(1882) 겨울 조선 경성에서 이 책을 구입했다’로 시작하는 그의 친필은 ‘삼청첩’ 45면에 보인다. 17세기 유학자로 서인 정치 세력의 영수였던 송시열(1607~1689)이 ‘삼청첩’을 감상하고 적은 기록인 ‘삼청첩발’의 문장들 중간 사이와 마지막 대목 다음에 자신의 글을 나눠 적은 것이다. ‘삼청첩발’은 병자호란 전란기 모든 가산이 불타는 참화 속에서도 탄은의 ‘삼청첩’을 지켜냈던 당대 소장자 무하공 홍주원(1606~1672)의 공덕을 칭송한 소장 내력기다. 왜군이 침략한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태어난 명작을 전란 발발 290년 만에 다시 조선을 침탈한 일본의 군인이 손에 넣고 입수 내력을 송시열의 찬문 텍스트에 기고만장한 모양새로 덧붙였으니 기막힌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쓰보이는 ‘삼청첩 원본에 나온 제작 시기는 우리(일본)의 조선 정벌(임진왜란) 중 화의가 진행되던 시기였다’고 한자와 가타카나를 섞은 글씨들로 의기양양하게 적어놓았다.
‘삼청도도(三淸滔滔)―매·죽·난, 멈추지 않는 이야기’ 1부 전시장에 56면 전면이 공개된 ‘삼청첩’의 표지와 앞부분 그림들. 대구간송미술관 제공
탄은의 명품 시화첩 ‘삼청첩’의 탄생과 전래에 얽힌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지난 9월부터 지난 21일까지 대구간송미술관에서 열렸던 기획전 ‘삼청도도(三淸滔滔)―매·죽·난, 멈추지 않는 이야기’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삼청첩’은 사상 처음 빈 공지와 훼손 부분까지 포함한 화첩 56면 전체가 공개돼 올곧은 필력과 후대 소장자들이 보관과 전래를 위해 헌신한 자취들을 일러주었다. 핵심인 20면의 대나무, 난초, 매화 그림들은 특유의 꼿꼿하고 유려한 필선으로 묘사되는데, 전란의 역경에 굽히지 않은 의기로 충만하다. 난초 잎새와 대줄기, 댓잎의 사실적인 사생력과 절제된 필치, 매화 꽃대와 둥치의 색다른 구도 등이 돋보이는 첩의 그림들은 조선풍 묵죽매 그림의 기틀을 세웠다고 평가받는다.
이 명작 시화첩의 드높은 인문적 가치는 작품을 전란 속에서 지키며 길이 전하려 한 소장자들의 충심에서 우러나온다고 할 수 있다. 첩의 37~42면에 윤신지(1582~1657)가 적은 내력글 ‘삼청첩발’을 보면, 탄은이 세상을 떠난 뒤 첩은 선조의 부마인 홍주원의 수중으로 들어간다. 병자호란 당시 그는 피난한 인조를 수행하고, 집안 식구들은 ‘삼청첩’을 들고 강화도로 피신하지만, 섬에 들어온 청군의 방화로 피난 집은 불타버린다. 이후 잿더미 속에서 발견된 ‘삼청첩’은 한호의 서문 글씨와 탄은의 시문 일부만 타거나 그을렸을 뿐 그림들은 무사했다. 기적적으로 병화를 피한 것이다.
‘삼청도도(三淸滔滔)―매·죽·난, 멈추지 않는 이야기’ 1부 전시장에 나온 이정의 ‘삼청첩’ 전면들 가운데 일부인 ‘난죽’. 대구간송미술관 제공
실제로 전시장에서는 불탄 흔적이 그대로 남은 한호의 서문 글씨(2면)와 탄은 한시첩들(29~35면)이 나와 옛 참화를 짐작할 수 있었다. 홍주원과 동서 사이였던 윤신지는 글에 당시 상황을 적어놓았다. ‘오직 이 첩 하나만이 잿더미 속에 떨어져 있었는데, …불길이 미쳐 …석봉의 글씨첩을 절반쯤 태웠지만, 대나무 그림에 이르러서는 불이 저절로 꺼져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늘이 아끼고 귀신이 보호하여 신물(神物)이 훼손되지 않았으니, 아! 공경할 만한 일이다.’
이후 ‘삼청첩’은 홍주원의 후손들이 가문의 명예를 빛내는 가보로 여겨 7대에 걸쳐 간직했으나, 임오군란 때 쓰보이에게 넘어가면서 일본을 떠도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1929년 도쿄미술구락부 경매 뒤엔 소유자가 변호사 하리마 류조로 바뀌면서 이역살이는 50년 이상 이어졌다. 첩을 고국에 돌아오게 한 구원자는 일제강점기 유출될 뻔한 문화유산들을 지킨 대수장가 간송 전형필(1906∼1962)이었다. 문화로 나라를 구한다는 신념을 지녔던 간송은 1935년, 일본 소유자 쪽과 흥정한 끝에 당시 서울 기와집 반채 값인 455원을 건네고 첩을 다시 조선으로 가져온다. 그렇게 ‘삼청첩’은 간송컬렉션의 일원으로 귀환했고, 이 땅 우국지사의 예술을 대표하는 절대 명품으로 남게 됐다.
‘삼청도도(三淸滔滔)―매·죽·난, 멈추지 않는 이야기’ 2부 전시장. 안쪽 한가운데 공간에 탄은의 ‘풍죽’을 내건 가운데 양옆으로 바람결에 흔들리는 대나무의 동영상이 ‘쏴’ 하는 소리를 내면서 흘러간다. 대구간송미술관 제공
‘삼청첩’ 그림들의 압권은 대나무다. 대의 생태를 바람에 하늘거리는 ‘풍죽’, 다 큰 ‘성죽’, 늙은 ‘통죽’, 막 자란 죽순의 생기 머금은 ‘순죽’ 따위로 나누어 묘사했다. 탄은은 대각선 구도나 댓잎 줄기의 섬세한 묘사로 상징성과 파격성을 함께 전해준다. 붓질 한번에 모양새를 빚어내야 한다는 원칙에 얽매이지 않았다. 거듭 붓질하며 실체적 명암 표현을 드러낸 통죽의 자태와 굽이치는 대나무 줄기의 생명력 등을 전해준다. 지폐 5만원권에도 나오는 전시장 2부의 대작 ‘풍죽’과 더불어 어떤 시련에도 굽히지 않겠다는, 고결한 선비 정신의 고갱이를 접할 수 있다. 후대 소장자 홍주원이 불탄 한석봉 서문 글씨의 별도 친필본을 소유자였던 먼 친척에게 수시로 달라고 간청해 결국 입수하고 지금 전하는 모습으로 복원시켰다는 윤신지의 ‘첩발’ 기록만 봐도 첩의 온전한 보전을 위해 얼마나 간절한 정성을 들였는지도 실감하게 된다. 일본에 유출된 ‘삼청첩’을 간송이 눈여겨보고 사들인 것 또한 이 절세 보물의 귀향을 위한 필연이 아니었을까.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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