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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가을, 보르도 뽀이약(Pauillac) 마을에 한 남자가 도착했습니다. 이름은 나다니엘 드 로칠드. 유럽 금융을 쥐락펴락하던 로칠드 가문의 일원이었죠. 그는 현지 은행가로부터 65에이커짜리 와이너리를 사들이고, 기존 이름 대신 자기 성을 붙여 샤또 무통 로칠드(Mouton Rothschild)라 불렀습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가장 비싼 이름표가 탄생했지만, 2년 뒤인 1855년 문제가 터졌습니다. 당시 프랑스 황제였던 나폴레옹 3세는 파리 만국박람회를 앞두고 보르도 상공회의소에 ‘전 세계에 프랑스 와인의 위엄을 과시할 전시 카탈로그를 만들라’고 지시를 내리면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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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나다니엘의 무통 로칠드은 2등급으로 분류됐습니다. 분노한 그는 이렇게 외쳤죠. “1등급은 되지 못했고, 2등급은 되지 않겠다. 나는 무통이다.(First I cannot be, second I do not choose to be, Mouton I am.)”
이 외침은 와인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명언이 됐습니다 사이다쿨바다이야기게임 . 그리고 무통은 절치부심 끝에 현재는 1등급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120년 ‘쩜오 설움’에도 “난 꺾이지 않아”…결국 전설이 된 이 와인>편에서 찾아보실 수 바다신2게임 있습니다.
오늘 와인프릭은 나다니엘 뿐만 아니라 수많은 보르도 생산자를 분노하게 한 보르도 와인 등급제에 대해 얘기합니다. 도대체 누가, 어떤 기준으로 1등급을 결정했는지, 그리고 그 기준은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한가에 대해서요.
와인을 테이스팅 중인 모습 황금성게임랜드 . [사진=ugcb.net]
가격이 만든 왕좌, 왕좌가 만든 가격
1855년의 등급 분류가 품질 심사가 아닌 가격 순위표였다는 사실은, 오늘날 와인 전문가 누구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공식 기록에도 남아 있습니다. 당시 네고시앙들이 “각 샤또의 명성과 그에 기반한 거래 가격(trading price)을 기준으로 등급을 매겼다”고 명시돼 있으니까요.
여기서 철저한 경제학적 역설이 시작됩니다. 품질이 뛰어나서 가격이 높아진 것이 아니었다는 방증이기 때문입니다. 그 시점에 비싸게 팔리던 와인이 1등급이 됐고, 1등급이 됐기 때문에 이후 더 비싸게 팔렸습니다. 사회학자 로버트 K. 머튼이 정의한 자기실현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의 완벽한 교과서인 셈입니다. 가격이 등급을 만들고, 등급이 다시 가격을 만드는 순환 구조가 170년 넘게 굴러가고 있는 것이죠.
그 증거는 무통 로칠드의 이야기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납니다. 무통은 1855년부터 118년 동안 2등급이었습니다. 그러다 1973년, 자크 시라크 프랑스 농림부 장관의 승인으로 마침내 1등급으로 승격됩니다.
이것이 1855년 등급 체계가 생긴 이래 단 한 번 일어난 등급 변경입니다. 170년 중 단 한 번. 와인 품질이 170년간 굳어진 순위에 비례해 딱 멈춰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반대가 진실에 가깝죠. 체계가 워낙 단단히 굳어있어, 아무리 훌륭한 와인을 만들어도 등급표를 뒤집는 게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샤또 피숑 롱그빌 꽁떼스 드 라랑드, 샤또 레오빌 라스 까즈, 샤또 팔머… 와인 애호가라면 누구나 아는 이 이름들은 각각 2등급과 3등급으로 분류돼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수십 년간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 이 와인들은 1등급 샤또들을 수없이 꺾어왔죠. 등급표와 실제 맛 사이의 괴리는 와인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슈퍼 세컨드라 불리는 보르도 2등급 와인들. Credit Unknown.
1976년 파리, 왕관이 굴러떨어진 날
이 괴리가 전 세계에 공개적으로 폭로한 사건이 있습니다. 1976년 5월 24일, 파리에서 열린 블라인드 테이스팅입니다. 훗날 파리의 심판(Judgment of Paris)으로 불리게 될 이 이벤트는, 영국인 와인 상인 스티븐 스퍼리어가 미국 독립 200주년을 기념해 기획한 행사였습니다.(참고로 올해는 미국 독립 250주년이자, 파리의 심판 50주년입니다.)
캘리포니아 와인과 프랑스 최정상 와인들을 나란히 놓고, 프랑스 최고 심사위원들이 라벨을 가린 채 점수를 매기게 했습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화이트 부문 1위는 나파밸리의 샤또 몬텔레나 샤도네였고, 레드 부문 1위는 나파밸리의 스택스 립 까베르네 소비뇽이 차지했습니다. 프랑스 심사위원들이 직접, 보르도 그랑 크뤼를 제치고 미국 와인에 더 높은 점수를 준 겁니다.
당시 현장에 있던 프랑스 심사위원들의 반응은 인상적이었습니다. 몇몇은 “이건 말도 안 된다”며 채점표를 돌려달라고 했고, 또 다른 이들은 “캘리포니아 와인은 숙성이 안 되니 10년 뒤에 다시 비교하면 프랑스가 이길 것”이라며 궁색한 논리를 펴기도 했습니다. 30년이 지난 2006년엔 30주년 기념 재대결도 열렸습니다만, 이 역시 결과는 캘리포니아의 완승이었습니다. 1등급 보르도 와인은 10위권에 단 한 병도 들지 못했죠.
이 이야기가 불편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왕관은 머리에 쓰고 있는 사람 것이 아니라, 심판이 결정하는 것임을 보여줬으니까요. 그리고 그 심판이 라벨을 보지 않으면, 결과는 우리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곤 합니다.
파리의 심판에서 시음 중인 심사단. 미슐랭 3스타 음식점의 수석 소믈리에와 최고급 와이너리 소유주, 프랑스 와인 등급 체계 위원회 수석 감독관 등 당대 최고의 프랑스인 와인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뇌가 맛을 결정한다는 증거들
2008년 미국에서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발표됐습니다. 와인 애호가 6000명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블라인드 테이스팅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비전문가들은 오히려 비싼 와인을 저렴한 와인보다 더 낮게 평가했다는 겁니다.(2008년 미국 와인경제학자협회 와인경제학저널에 게재된 로빈 골드스타인 연구팀의 논문 ‘비싼 와인이 더 맛있는가?’)
캘리포니아공과대학(Caltech)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피험자들에게 동일한 와인을 마시게 하면서, 어떤 때는 “이건 5달러짜리야”라고, 어떤 때는 “45달러짜리야”라고 알려줬습니다.
그러자 45달러라고 들은 와인을 마실 때 뇌의 안와전두피질(Orbitofrontal Cortex), 즉 보상과 쾌감을 처리하는 영역의 활성화가 눈에 띄게 증가했습니다. 와인은 동일했지만, 가격 정보가 실제 미각 경험을 바꿔버린 겁니다.
그렇다면 와인 전문가들의 경우는 어떨까요? 세계 최고 권위의 와인 전문지 와인 스펙테이터(Wine Spectator)는 2020년부터 보르도 1등급 샤또들에게 블라인드 테이스팅 심사에 참여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라피트 로칠드, 마고, 라투르, 무통 로칠드, 오브리옹, 이른바 5대 샤또 모두 거절했습니다. 2024년 와인 스펙테이터는 “1등급 샤또들이 여전히 블라인드 테이스팅 기준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며 공개적으로 이 문제를 지적했죠. 어쩌면 라벨을 가리면 1등급의 아우라가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는 겁니다.
5대 샤또라 불리는 보르도 1등급. 왼쪽부터 샤또 오브리옹, 마고, 라뚜르, 무통 로칠드, 라피트 로칠드. Credit Unknown.
가격이 오를수록 더 잘 팔리는 이유: 베블런의 저주
경제학에는 베블런재((Veblen財·Veblen Goods)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19세기 말 미국의 사회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이 유한계급론(Theory of the Leisure Class)에서 정의한 개념으로, 가격이 오를수록 오히려 수요가 늘어나는 재화를 말합니다. 일반 경제학의 수요-공급 법칙을 완전히 거스르는 이 역설적 상품들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소비 자체가 ‘계급의 표시’가 된다는 것이죠.
보르도 1등급 와인은 베블런재의 가장 완벽한 사례입니다. 현재 국내에서 유통되는 샤또 라피트 로칠드나 샤또 마고의 최신 빈티지 가격은 병당 100만~150만원 선입니다. 특별한 해 또는 올드 빈티지는 수백만원을 훌쩍 넘습니다.
그런데 이 가격이 오르면 오를수록, 사람들은 더 갖고 싶어합니다. 오히려 보르도 1등급 와인이 150만원에서 80만원으로 갑자기 내려가면 오히려 “뭔가 문제가 있나?”라고 의심하는 게 이 시장의 논리입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이 와인을 구매하는 행위가 단순히 ‘맛있는 술’을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1855년 나폴레옹 황제의 1등급 리스트에 오른 와인을 살 수 있는 사람이다”라는 사회적 신호(Social Signaling)를 구매하는 것이죠.
와인에만 해당하는 게 아닙니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회적 인간은 사회적 신호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에르메스 버킨백을 사는 사람이 단순히 가방이 필요해서 살까요. 강남의 50평 아파트를 사는 사람이 비바람을 피할 지붕만 원할까요. 도로 위의 포르쉐 운전자가 그저 목적지에 빨리 가고 싶은 것일까요.
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구매하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그 물건이 전달하는 계급적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보르도 1등급 와인만큼 그 메시지를 170년의 역사와 함께 응축해 놓은 상품은 지구상에 많지 않습니다.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
무너지는 왕좌: 2025년 보르도의 현실
그러나 최근 몇 년, 보르도 왕좌 아래서 심상치 않은 균열 소리가 들립니다.
우선 한때 보르도 그랑 크뤼의 가장 큰 단일 소비 시장이었던 중국이 무너졌습니다. 중국의 경기 침체와 소비 위축이 겹치면서, 보르도 그랑 크뤼 클라세의 대중국 수출액은 2024년 기준 2억4000만유로로 쪼그라들었습니다. 한때 정점이었던 수치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죠.
고급 와인 시장의 벤치마크 지수인 Liv-ex 100은 2023년부터 2025년까지 3년 연속 하락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보르도 지역은 2025년 전후로 포도밭의 20%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는 분석도 나왔습니다.
보르도 특유의 선물 시스템인 엉 프리메르(En Primeur) 시장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와인이 숙성되기도 전에 미리 사들이는 이 시스템은 보르도의 ‘황제 마케팅’ 핵심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2023년 빈티지 엉 프리메르 캠페인은 처참하게 실패했습니다. 생산자들이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고수하자, 바이어들이 등을 돌려버렸습니다. 2024년 빈티지 역시 시장가 대비 평균 39% 할인된 가격으로 출시해야 했죠.
보르도그랑크뤼연합(UGCB)의 신임 회장 프랑수아-자비에 마로토가 지난해 방한 인터뷰에서 꺼낸 첫마디도 “우리는 그동안 잠자고 있었습니다”였죠. 170년 왕좌를 지킨 기관의 수장이 스스로 내뱉기에는 꽤 무거운 고백이었습니다.
베블런재의 공식이 무너지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이 ‘이 허상이 주는 계급적 만족감’에 더 이상 예전처럼 기꺼이 돈을 내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보르도 와인을 시음하고 있는 사람들. [사진=ugcb.net]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마셔야 하는가
여기까지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보르도 1등급은 사기니까 사지 말아야겠다”고요. 하지만 그것은 이 이야기의 핵심이 아닙니다.
샤또 라피트 로칠드의 한 병은 여전히, 수백 년 된 포도밭이 만들어낸 역사상 가장 완성도 높은 액체입니다. 훌륭한 빈티지라면 수십 년을 거치며 놀랍도록 복잡한 풍미로 진화하죠. 그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지나친 냉소입니다.
다만 우리가 명확히 인식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지불하는 150만원 중, 얼마가 포도즙의 물리적 품질에 대한 대가이고, 얼마가 1855년 황제의 가격표에 대한 로열티인가. 그 비율을 스스로의 원칙대로 비중을 두고 계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라벨에 휘둘리지 않는 주체적인 소비가 완성될 것입니다.
전 세계 6000건의 블라인드 테이스팅 데이터가 말하듯, 라벨을 가리면 우리의 혀는 예상보다 훨씬 민주적입니다. 1등급의 혀 세례를 받지 못한 수많은 슈퍼 세컨드(Super Second) 와인들이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1등급을 이겨왔습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같은 돈으로 훨씬 긴 와인 리스트 앞에 서게 되겠죠.
나다니엘 드 로칠드는 1855년 2등급 판정에 분노했지만, 그의 무통은 결국 1973년 1등급이 됐습니다. 등급표가 뒤집히는 데 걸린 시간은 118년이었죠. 그런데 어쩌면 현재 우리 각자의 잔 안에서, 등급표는 매 순간 뒤집히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라벨을 보지 않고 마시는 그 한 모금에서요.
와인은 혀로 느끼는 것이지만, 뇌가 완성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뇌에 무엇을 입력할지, 그것만큼은 온전히 마시는 사람의 몫이라는 점은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기자가 재미있고 맛있는 와인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가장 비싼 이름표가 탄생했지만, 2년 뒤인 1855년 문제가 터졌습니다. 당시 프랑스 황제였던 나폴레옹 3세는 파리 만국박람회를 앞두고 보르도 상공회의소에 ‘전 세계에 프랑스 와인의 위엄을 과시할 전시 카탈로그를 만들라’고 지시를 내리면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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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나다니엘의 무통 로칠드은 2등급으로 분류됐습니다. 분노한 그는 이렇게 외쳤죠. “1등급은 되지 못했고, 2등급은 되지 않겠다. 나는 무통이다.(First I cannot be, second I do not choose to be, Mouton I am.)”
이 외침은 와인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명언이 됐습니다 사이다쿨바다이야기게임 . 그리고 무통은 절치부심 끝에 현재는 1등급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120년 ‘쩜오 설움’에도 “난 꺾이지 않아”…결국 전설이 된 이 와인>편에서 찾아보실 수 바다신2게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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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미국에서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발표됐습니다. 와인 애호가 6000명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블라인드 테이스팅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비전문가들은 오히려 비싼 와인을 저렴한 와인보다 더 낮게 평가했다는 겁니다.(2008년 미국 와인경제학자협회 와인경제학저널에 게재된 로빈 골드스타인 연구팀의 논문 ‘비싼 와인이 더 맛있는가?’)
캘리포니아공과대학(Caltech)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피험자들에게 동일한 와인을 마시게 하면서, 어떤 때는 “이건 5달러짜리야”라고, 어떤 때는 “45달러짜리야”라고 알려줬습니다.
그러자 45달러라고 들은 와인을 마실 때 뇌의 안와전두피질(Orbitofrontal Cortex), 즉 보상과 쾌감을 처리하는 영역의 활성화가 눈에 띄게 증가했습니다. 와인은 동일했지만, 가격 정보가 실제 미각 경험을 바꿔버린 겁니다.
그렇다면 와인 전문가들의 경우는 어떨까요? 세계 최고 권위의 와인 전문지 와인 스펙테이터(Wine Spectator)는 2020년부터 보르도 1등급 샤또들에게 블라인드 테이스팅 심사에 참여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라피트 로칠드, 마고, 라투르, 무통 로칠드, 오브리옹, 이른바 5대 샤또 모두 거절했습니다. 2024년 와인 스펙테이터는 “1등급 샤또들이 여전히 블라인드 테이스팅 기준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며 공개적으로 이 문제를 지적했죠. 어쩌면 라벨을 가리면 1등급의 아우라가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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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에는 베블런재((Veblen財·Veblen Goods)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19세기 말 미국의 사회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이 유한계급론(Theory of the Leisure Class)에서 정의한 개념으로, 가격이 오를수록 오히려 수요가 늘어나는 재화를 말합니다. 일반 경제학의 수요-공급 법칙을 완전히 거스르는 이 역설적 상품들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소비 자체가 ‘계급의 표시’가 된다는 것이죠.
보르도 1등급 와인은 베블런재의 가장 완벽한 사례입니다. 현재 국내에서 유통되는 샤또 라피트 로칠드나 샤또 마고의 최신 빈티지 가격은 병당 100만~150만원 선입니다. 특별한 해 또는 올드 빈티지는 수백만원을 훌쩍 넘습니다.
그런데 이 가격이 오르면 오를수록, 사람들은 더 갖고 싶어합니다. 오히려 보르도 1등급 와인이 150만원에서 80만원으로 갑자기 내려가면 오히려 “뭔가 문제가 있나?”라고 의심하는 게 이 시장의 논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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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에만 해당하는 게 아닙니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회적 인간은 사회적 신호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에르메스 버킨백을 사는 사람이 단순히 가방이 필요해서 살까요. 강남의 50평 아파트를 사는 사람이 비바람을 피할 지붕만 원할까요. 도로 위의 포르쉐 운전자가 그저 목적지에 빨리 가고 싶은 것일까요.
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구매하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그 물건이 전달하는 계급적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보르도 1등급 와인만큼 그 메시지를 170년의 역사와 함께 응축해 놓은 상품은 지구상에 많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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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한때 보르도 그랑 크뤼의 가장 큰 단일 소비 시장이었던 중국이 무너졌습니다. 중국의 경기 침체와 소비 위축이 겹치면서, 보르도 그랑 크뤼 클라세의 대중국 수출액은 2024년 기준 2억4000만유로로 쪼그라들었습니다. 한때 정점이었던 수치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죠.
고급 와인 시장의 벤치마크 지수인 Liv-ex 100은 2023년부터 2025년까지 3년 연속 하락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보르도 지역은 2025년 전후로 포도밭의 20%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는 분석도 나왔습니다.
보르도 특유의 선물 시스템인 엉 프리메르(En Primeur) 시장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와인이 숙성되기도 전에 미리 사들이는 이 시스템은 보르도의 ‘황제 마케팅’ 핵심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2023년 빈티지 엉 프리메르 캠페인은 처참하게 실패했습니다. 생산자들이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고수하자, 바이어들이 등을 돌려버렸습니다. 2024년 빈티지 역시 시장가 대비 평균 39% 할인된 가격으로 출시해야 했죠.
보르도그랑크뤼연합(UGCB)의 신임 회장 프랑수아-자비에 마로토가 지난해 방한 인터뷰에서 꺼낸 첫마디도 “우리는 그동안 잠자고 있었습니다”였죠. 170년 왕좌를 지킨 기관의 수장이 스스로 내뱉기에는 꽤 무거운 고백이었습니다.
베블런재의 공식이 무너지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이 ‘이 허상이 주는 계급적 만족감’에 더 이상 예전처럼 기꺼이 돈을 내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보르도 와인을 시음하고 있는 사람들. [사진=ugcb.net]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마셔야 하는가
여기까지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보르도 1등급은 사기니까 사지 말아야겠다”고요. 하지만 그것은 이 이야기의 핵심이 아닙니다.
샤또 라피트 로칠드의 한 병은 여전히, 수백 년 된 포도밭이 만들어낸 역사상 가장 완성도 높은 액체입니다. 훌륭한 빈티지라면 수십 년을 거치며 놀랍도록 복잡한 풍미로 진화하죠. 그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지나친 냉소입니다.
다만 우리가 명확히 인식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지불하는 150만원 중, 얼마가 포도즙의 물리적 품질에 대한 대가이고, 얼마가 1855년 황제의 가격표에 대한 로열티인가. 그 비율을 스스로의 원칙대로 비중을 두고 계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라벨에 휘둘리지 않는 주체적인 소비가 완성될 것입니다.
전 세계 6000건의 블라인드 테이스팅 데이터가 말하듯, 라벨을 가리면 우리의 혀는 예상보다 훨씬 민주적입니다. 1등급의 혀 세례를 받지 못한 수많은 슈퍼 세컨드(Super Second) 와인들이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1등급을 이겨왔습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같은 돈으로 훨씬 긴 와인 리스트 앞에 서게 되겠죠.
나다니엘 드 로칠드는 1855년 2등급 판정에 분노했지만, 그의 무통은 결국 1973년 1등급이 됐습니다. 등급표가 뒤집히는 데 걸린 시간은 118년이었죠. 그런데 어쩌면 현재 우리 각자의 잔 안에서, 등급표는 매 순간 뒤집히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라벨을 보지 않고 마시는 그 한 모금에서요.
와인은 혀로 느끼는 것이지만, 뇌가 완성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뇌에 무엇을 입력할지, 그것만큼은 온전히 마시는 사람의 몫이라는 점은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기자가 재미있고 맛있는 와인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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