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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6·25 기획 ‘명장’이 다루는 마지막 장군은 더글러스 맥아더입니다. 맥아더에 대해선 할 말이 참 많습니다. 관련 기록도 방대하고, 평가도 극단적으로 갈립니다. 그래서 한국일보는 맥아더만큼은 한 번에 끝내지 않고, 세 달에 걸쳐 세 번(상·중·하)으로 나눠 최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다루고자 합니다. 4월 출고되는 마지막 세 번째 파트(하편)는 맥아더 군사 경력의 최대 오점인 1950년 겨울 중공군 개입을 다룹니다. △중공군의 1·2차 공세 △중공군 공세에 밀린 맥아더의 대응 등 두 차례로 나눠 연재합니다. 이 글은 그중 마지막 연재입니다.
오리지널골드몽
※ '거인의 퇴장 ①'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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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서 작두 탄 ‘전쟁의 신’ 맥아더… 북진 땐 헛발질 거듭 나락으로 [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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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 맥아더(오른쪽) 유엔군사령관과 매슈 리지웨이(왼쪽) 미8군사령관이 1951년 4월 초 강원 양양 지역을 순시하고 있다. 중간에 보이는 인물은 맥아더 사령부 참모장인 도일 히키 소장이다. 미 국립문서기록 릴게임갓 관리청
“우린 완전히 새로운 전쟁에 직면했다(We face an entirely new war). 본 사령부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지금 상황은 본 사령부의 통제와 역량을 벗어난 상태다.”
1950년 11월 28일 새벽 백경게임랜드 . 미국 펜타곤에서 밤을 새우던 당직 대령 존 비시라인은 더글러스 맥아더의 도쿄 사령부에서 날아온 긴급 전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불과 4일 전 크리스마스 공세(Home by Christmas Offensive)를 시작하며 “금방 전쟁을 끝낼 것”이라고 큰소리치던 맥아더가 갑자기 “전쟁을 지고 있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직 장교가 도저히 대처 릴게임몰메가 할 수 없는 사태였다. 그래서 대령은 육군 작전·행정 참모부장(참모차장 바로 아래)인 매슈 리지웨이 중장을 긴급 호출했다. 이때가 오전 4시 15분이다.
맥아더 전문 내용을 들은 리지웨이 역시 육군 선에서 대응할 문제가 아니란 걸 직감했다. 이건 대통령에게 즉각 보고해야 할 사안이었다. 리지웨이는 곧바로 로턴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을 호출했고, 콜린스가 다시 오마 브래들리 합동참모의장을 통해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알렸다. 트루먼은 그날 즉시 워싱턴 외교·안보 핵심 관계자를 모두 불러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소집했다. 대통령 트루먼, 부통령 앨번 바클리, 국무장관 딘 애치슨, 국방장관 조지 마셜, 합참 구성원(의장+3군참모총장), 중앙정보국(CIA) 국장 월터 베델 스미스, 대통령 특별보좌관 애브럴 해리먼이 모였다. 재무장관 존 스나이더까지 소환된 긴급 회의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왜 갑자기 맥아더가 이런 불길한 보고를 보낸 거지? NSC는 충격과 혼란에 사로잡혔다. 맥아더는 한 달 반 전(10월 15일) 트루먼을 만나 “중공군이 한반도에 들어오면 지상 최대의 살육전을 안겨줄 것”이라고 자신했고, 4일 전엔 중공군 숫자가 많아봐야 7만 명일 거라며 “크리스마스 전에 병사들을 집에 돌려보낼 것”이라 말하지 않았나. 워커 휘하 병력이 24만 명인데, 어떻게 7만 명 중공군을 상대하며 ‘통제와 역량을 벗어난 상태’까지 상황이 나빠질 수 있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 가지 않는 것투성이었다.
“(바로 나흘 전) 크리스마스까지 전쟁 끝내겠다는 그 말, 진짜 맥아더가 한 말이 맞습니까? 그게 맞다면 그 사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았던 건가요?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했던 겁니까?”
(11월 28일 NCS에서 부통령 바클리가 던진 질문)
워커와 맥아더가 1950년 10월 20일 평양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해리 트루먼 도서관
⑤도쿄 11월 28일: 미몽 탈출
애석하게도 워싱턴에선 부통령의 이 질문에 대답해 줄 사람이 없었다. 국방장관이나 합참이 가장 당황했던 대목은 맥아더가 돌연 “전구사령관(맥아더)의 능력으로 해결 불가능한 전 세계적 상황”으로 이 전쟁을 규정했다는 점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기 능력 안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겠다고 자신했던 맥아더는 갑자기 전지전능함을 부정하고 워싱턴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 하고 있었다. 이제 트루먼, 마셜, 합참이 이 전쟁을 직접 챙겨야만 했다.
펜타곤이 ‘한반도 철수 방안’까지 고려(당시 리지웨이가 육군참모차장과 논의)할 정도로 워싱턴 전체가 충격에 휩싸인 그때, 맥아더는 8군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과 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을 도쿄사령부로 불러 대책을 추궁하고 있었다. 맥아더가 책임을 대통령에게 떠넘길 정도로 혼이 나간 반면, 두 야전사령관 워커와 알몬드는 맥아더만큼 충격을 받진 않았다. 서부전선 워커는 후퇴하는 병력을 추슬러 평양 사수를 할 수 있겠다고 답했고, 항상 지략보다 용기가 앞섰던 동부전선 알몬드는 그 상황에서도 북쪽과 서쪽으로 더 진격할 수 있다고 배포 있게 말했다.
바쁜 야전사령관들을 급하게 불러 놓고도, 맥아더는 얘기를 듣기만 했을 뿐 뭔가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단지 워커에겐 “가능하면 평양을 사수하되 상황에 따라 포기하게”라며 하나 마나 한 지시를 내렸고, 공격하겠다는 알몬드에겐 “함흥-흥남 라인을 지키고 있게”라고 충고하는 정도에 그쳤다. 9년 전(1941년 12월 일본의 필리핀 침공)에도 그랬던 것처럼, 평화 시엔 큰소리를 치다가 막상 위기에 처하면 결정을 회피한 채 움츠리는 맥아더의 버릇이 이번에도 반복됐다.
“그때 거기서 맥아더를 잘라 버렸어야 했는데…”
(해리 트루먼이 1950년 11월 말을 돌이키며 남긴 회고)
1950년 10월 15일 한국전쟁 논의를 위해 남태평양 웨이크섬에서 만난 해리 트루먼(왼쪽) 대통령과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악수하고 있다. 미 국무부(위키미디어 커먼스)
워싱턴에서 벌집 쑤신 듯 북새통이 벌어지고, 두 부하 사령관(워커·알몬드)이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는 사이, 맥아더는 난리가 난 한국에 갈 생각은 하지 않고 도쿄에 앉아 ‘면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주요 언론과의 연쇄 인터뷰를 통해 "트루먼 행정부가 유럽에만 신경을 쓰고 아시아는 소홀히 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터진 것"이라며 워싱턴을 겨냥했다. US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와의 서면 인터뷰를 통해 “유엔이나 다른 곳에서 중공군 공격에 대한 아무런 경고가 없었다”면서 정보 실패 책임을 본국 정부에 떠넘겼다. 그리고 “국경 지대에 대한 공중 정찰도 허용되지 않았다”면서 “군사 역사상 이렇게 많은 핸디캡을 안고 싸운 경우는 없었다”고 대통령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맥아더의 변명은 사실과 정반대였다. 미국 역사상 1950년 7~11월의 맥아더처럼 지역사령관이 본국 정부 의견을 외면하고 마음대로 전략 방향까지 결정한 예는 없었고, 그렇게나 자주 대통령과 합참의 지시를 무시하고도 자리를 보존했던 군사 지휘관은 맥아더가 유일했다. ‘미군 역사상 이렇게 폭넓은 재량권을 쥐고 싸운 장군은 없었다’고 말하는 게 오히려 더 사실에 부합한다. 맥아더가 하도 적반하장으로 나오니 군 후배들 사이에서도 맥아더의 오만함을 응징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12월 초 리지웨이는 합참이 맥아더에게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기로 결정하자 호이트 반덴버그(웨스트포인트 후배) 공군참모총장에게 “합참은 명령을 어기는 어떤 사령관이라도 해임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강하게 따져 묻기도 했다.
트루먼과 맥아더의 갈등 사례. 송정근 기자
그럼에도 트루먼은 그때부터 5개월을 더 맥아더를 지켜보다가 1951년 4월 중순에야 해임 명령을 내렸다 그 이유에 대해 트루먼은 “전투에 졌다고 사령관을 해임하는 것으로 보이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라며 “대통령의 체면을 무시한 장군이라 할지라도 그의 체면을 지켜 줘야만 했다”고 설명했다. 트루먼은 “내 부하는 내가 지켜야 했다”고도 말했다. 개인적으론 매우 성마르고 직선적인 성격이었던 트루먼이었지만, 맥아더의 즉각적 해임이 국가에 가져올 충격파를 감안해 개인적 모욕을 잠시 감내하는 선공후사 대범함을 보여준 것이다.
맥아더가 당시 한반도 상황을 얼마나 오판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명백한 사례가 하나 있다. 맥아더는 1950년 12월까지도 한반도에 파병된 중공군 사령관을 린뱌오(林彪·임표)로 알고 있었다. 린뱌오는 국공내전에서 최고의 공을 세운 중공군 제1의 명장이긴 했지만, 미국과의 전쟁에 반대해 실제론 한국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다. 한반도에 들어온 중공군의 총사령관은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였는데, 맥아더는 적 총사령관이 누구인지도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정보 수집에 손을 놓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시점까지도 여전히 중공군 총병력을 20만 명(실제 30만 이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해가 진 후 평양 동쪽을 지나는 길이었다.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아 밤하늘을 밝혔고, 수많은 피란민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미군 보급소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워커 사령관이 보급 물자를 모조리 불태우도록 명령했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불더미로 들어가 옷 한 개라도 건지려 했고, 미군이 위협사격을 하며 쫓아내는 광경도 볼 수 있었다.”
(당시 국군1사단장 백선엽이 목격한 평양 철수)
1950년 12월 3일 북한의 피란민들이 평양 대동강을 맨발로 건너 남쪽으로 피란을 가고 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⑥평양 12월 3일: 한 많은 대동강
“아버지, 생신 축하합니다.”
12월 3일은 워커의 예순한 번째 생일이었다. 한 젊은 장교가 평양의 8군사령관 지휘차량으로 다가가 사령관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워커가 서른여섯에 낳은 늦둥이(당시 기준) 외아들 샘 워커(25) 대위였다. 샘은 아버지와 함께 한국전쟁에 참전해 당시 24사단 중대장으로 대동강 철교 경비 업무를 맡고 있었는데, 아버지 생일 축하를 위에 잠시 사령부를 찾은 것이었다. 워커가 교통사고로 순직하기 불과 20일 전이다. 이때가 아들이 아버지에게 건네는 마지막 생일 축하가 될 거라곤 당시로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때 워커는 사실 생일 따위를 챙길 여유가 없었다. 이날 워커는 “4일 오전 8시를 기해 모든 유엔군 병력은 평양에서 철수하라”는 총퇴각 명령을 내렸다. 맥아더와의 도쿄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11월 29일 오후, 워커는 청천강 쪽 전선 상황이 시시각각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사라졌던 중공군은 여기저기에서 신출귀몰 중이었고, 중공군 출몰 지점에선 아군의 패퇴 소식만 전해졌다. 지금 속도대로 계속 밀린다면 평양에 방어선을 친다 한들 측면이 뚫려서 곧바로 포위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결국 “평양을 사수하겠다”는 말을 맥아더에게 남기고 왔던 워커는 생각을 바꿔 평양 포기를 결심했다. 맥아더에게 평양 철수 승인을 요청하는 보고를 보냈지만,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평양 철수는 워커 스스로 결정한 일이었다.
1950년 12월 4일 피란민들이 평양 대동강의 부서진 다리를 넘어 남쪽으로 피란을 가고 있다. 이 사진을 찍은 맥스 데스포어는 이듬해 퓰리쳐상을 수상했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유엔군 패주 소문이 이미 널리 퍼져 있어, 12월 3일부터 민간인의 피란 행렬이 시작됐다. 당시 미군은 평양과 그 주변에서 남하하려던 피란민을 30만 명 정도로 추정했는데, 대동강을 지나는 다리들이 속속 끊어져 일부 피란민들은 물살을 헤치고 직접 강을 건너거나 부서진 철교 위를 위험하게 걸어 남쪽으로 대피했다. 당시 평양에 있었던 백선엽은 “대동강에 가설된 부교까지 폭파돼 피란민들이 필사적으로 강을 건너다 차디찬 물에 빠져 죽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워커는 땅을 조금씩 내주며 순차적으로 후퇴하는 방식이 아니라 신속한 퇴각을 결정했다. 청천강에서 물러난 뒤 평안남도 남부지방이나 황해도에서 방어선을 치지 않고, 곧바로 서울 북방 임진강까지 250㎞를 한 번에 물러난 것이다. 워커의 이 신속한 총퇴각은 두고두고 아쉬움을 남긴 결정이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이렇게 포기한 평양과 개성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다시는 되찾지 못했다. 한반도 통일은 이때의 평양 철수와 함께 사실상 물 건너간 일이 돼 버렸다. 나중에 알게 된 중공군 보급 능력(1주일 이상 공세를 지속하기 어려움)을 감안할 때, 만약 당시 워커가 지형을 이용해 평양 인근에서 견고한 방어선을 유지했더라면, 중공군 공세를 한두 번 격퇴하고 다시 북진을 시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런 아쉬움은 모두 결과론적인 해석이다. 오히려 △워커의 공격 지향적인 평소 스타일 △일선부대 상황을 세세하게 챙겼던 지휘 철학 △전장의 지형을 중시했던 철저한 준비성 등을 감안한다면, 당시 현장에서 모든 상황을 다 조망할 수 있었던 워커의 선택이 합리적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게 맞다. 급사한 워커가 남긴 회고록이 없어 당시 어떤 생각으로 후퇴 결정을 내렸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워커와 가까웠던 8군 군수참모(G-4) 앨버트 스테빈스 대령의 증언을 참조하면 ‘8군 병력을 지키기 위해’ 이런 대대적인 퇴각 명령을 내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전한 후방에서 장기간 전력 보강 작업을 하지 않고서는 반격조차 시도할 수 없을 정도로 8군의 상태가 엉망이었다는 얘기다. 오히려 워커가 명백하게 잘못한 부분은 1차 공격(10월 추수감사절 공세) 당시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패퇴한 국군 2군단을 2차 공격(11월 크리스마스 공세)에서도 똑같이 우익에 단독으로 배치했다는 점이다. 국군1사단을 미 1군단에 배속했던 것처럼, 국군2군단 예하 3개 사단을 분산시켰다면 미군이 국군을 지원하면서 중공군 공세를 버텼을 수도 있다.
“맥아더 장군과 워커의 후임자를 누구로 앉힐지 논의한 적이 있었다. 워커는 항상 위험한 전투 현장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만약을 대비해야 했다. 맥아더는 리지웨이를 원했다. 나도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당시 육군참모총장 로턴 콜린스의 회고)
월튼 워커 장군. 위키미디어 커먼스
워커는 몇 가지 아쉬운 결정을 내리긴 했지만, 순직 직전 의도치 않게 한국에 ‘마지막 선물’을 안겨주기도 했다. 도저히 맥아더를 믿을 수 없었던 트루먼과 합참은 육군참모총장 콜린스를 한국에 보내 직접 전선 상황을 파악하도록 했는데, 워싱턴이 한반도 포기까지도 고려하고 있던 순간에 워커는 육군참모총장을 향해 ‘충분히 싸울 만하다’는 희망을 불어넣었다. 12월 4일 콜린스를 만난 워커는 “지금 병력만으로도 서울에서 충분히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고, 잠시 서울을 잃더라도 낙동강 방어선으로 후퇴해 전열을 가다듬은 뒤 재반격할 수 있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콜린스는 ‘상황이 나쁘긴 했지만 절망적인 상태는 아니다’라는 판단을 내렸고, 8군의 저항 의지를 합참과 대통령에게 소상히 전달했다. 이 덕분에 미국 정부는 철수 대신 항전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당시 합참의장 브래들리는 “콜린스의 보고를 듣고 햇살이 비치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는데, 그 햇살은 실은 워커에게서 시작된 것이었다.
이때 맥아더는 부하들의 사기를 고무하기는커녕 워커의 방어 계획에 재를 뿌리고 있었다. 12월 초 맥아더는 본국 정부에 “대만군을 끌어들이자”거나 “만주 폭격을 허가해 달라”며 확전을 시도하고 있었다. 또 도쿄를 방문한 콜린스를 만나선 “본국 정부가 추가 병력을 지원하지 않으면 한반도에서 물러나야 할 것”이라며 엄포를 놓았다. 맥아더가 이렇게 무리한 요구를 계속한 이유는 ‘워싱턴이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 전쟁에서 진 것’이라는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인 것처럼 보였다. 워싱턴은 맥아더의 요구를 모두 물리치자, 맥아더는 이를 ‘패배주의’라고 거침없이 비판했다.
맥아더가 큰소리를 칠수록 그의 모습은 초라해 보였다. 맥아더가 한반도 상황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워싱턴도 눈치채기 시작했다. 맥아더를 대신해 콜린스를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보내자는 의견까지 나왔다. 인천에서 시작된 맥아더 신화는 여기저기에서 허물어지고 있었다.
“월튼 워커는 거칠고 좁은 한국의 빙판길에서 지프 속도를 한없이 높였다. 12월 23일 워커는 운전병, 부관, 경호원과 함께 지프를 타고 북쪽으로 가고 있었다. 갑자기 한국군 무기 운반 차량이 중앙선을 넘어 지프 앞으로 뛰어들었고, 워커의 차는 충돌을 피하다 전복됐다. 워커는 즉사했다.”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1950년 12월 15일 월튼 워커 미8군사령관이 타흐신 야즈즈 튀르키예 1여단장(당시 준장)에게 은성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워커는 이 사진을 찍은 뒤 8일 후 사고로 사망했다. 미 육군(위키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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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서울 12월 23일: 한 영웅의 죽음
미8군사령관 워커가 1950년 12월 23일 사망했다. 워커는 서울 북방에 주둔하던 미24사단과 영국27여단을 방문해 수훈 장병들을 표창할 예정이었다. 그 길에 아들 샘(24사단 중대장)을 만나 크리스마스 휴일을 함께 보낼 생각이었다. 워커의 지프는 이날 오전 10시 30분 경기 양주군 도봉리(현재 서울 도봉역 인근)에서 국군 6사단 화물차와 충돌해 길 밖으로 이탈했다. 워커는 머리를 크게 다쳤고 근처 24사단 야전치료소로 이송됐으나, 군의관이 10시 50분 워커의 사망을 확인했다.
워커의 죽음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다. 이미 당시 맥아더의 행보를 보면 한반도를 거의 포기한 것 같았다. 그 즈음 맥아더가 워싱턴에 보낸 보고를 보면 철수(evacuation)라는 말이 자주 보였다. 대만군 또는 미군 부대를 추가로 지원하지 않을 거면, 미군 병력을 모두 일본으로 빼 가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실상 1950년 12월의 한국전쟁은 워커 혼자 끌고 가는 양상이었고, 워커가 국군과 유엔군의 후방 철수 작전을 책임지고 있었다. 악전고투하던 워커마저 갑자기 사망하자 유엔군은 완벽한 지휘부 공백 상태에 빠졌다. 워커의 급사로 1군단장 프랭크 밀번 소장이 8군사령관직을 대행했다. 밀번은 온화하지만 소극적이었고, 리더십 있는 장군도 아니어서, 위기에 빠진 대군을 오래 지휘하게 둘 수는 없었다. 워싱턴이 빨리 워커 후임을 보내야 했다.
그나마 한국 국민이나 미국 정부에 정말 다행이었던 점은 명장 워커의 후임이 또 다른 명장 리지웨이였다는 점이다. 2차 대전 유럽 전선에서 사단장과 군단장을 지낸 뒤 펜타곤에서 요직(육군참모부장)을 꿰찬 리지웨이는 당시 미국이 전쟁 지역 야전사령관으로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인재였다. 리지웨이는 워커 사망 소식을 들은 뒤 인사 명령을 받고 곧바로 극동으로 날아와 12월 26일 도쿄를 거쳐 한국에 도착했다. 도쿄에서 리지웨이를 만난 맥아더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맥아더는 리지웨이에게 “8군은 자네 소관일세”라며 “자네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하게”라고 당부했다. 중공군의 갑작스러운 개입으로 패색이 짙어진 단계에 이르자, 그제야 맥아더는 야전사령관에게 전권을 부여했다. 리지웨이에게 모든 책임을 넘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워커 사망 후 리지웨이 일정. 송정근 기자
“매슈 리지웨이가 한 일은 전쟁을 하는 데 최고사령관(맥아더)이 필수불가결한 인물이 아니란 점을 입증한 것이다. 리지웨이가 적과 싸우는 동안 맥아더는 워싱턴과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윌리엄 맨체스터의 전기 ‘맥아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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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에필로그: 거인의 마지막
리지웨이의 등장(1950년 12월 26일)은 3년의 6·25 전쟁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였다. 리지웨이 부임 이후 맥아더가 한국전쟁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다. 맥아더가 떠넘긴 책임을 모두 등에 진 리지웨이는 후퇴(1·4후퇴)와 반격 작전(1951년 1~4월)을 보란 듯이 훌륭하게 해냈다. 리지웨이는 유엔군과 국군에 ‘공격정신’을 강조하며 북위 37도선까지 물러났던 전선을 3개월 만에 다시 38도선까지 올리는 데 성공했다. 리지웨이의 의지가 없었다면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 4차공세(1951년 2월)와 춘계공세(4·5월)를 버티지 못하고 한반도 전역을 공산군 손에 내줬을 수도 있었다. 리지웨이의 가장 큰 공은 ‘맥아더 없이도 이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는 걸 눈으로 보여준 것이다. 맥아더는 리지웨이의 공세 계획을 그저 승인해 주는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기에 이르렀다.
리지웨이의 성공이 쌓이면서 인천의 환상에서 벗어난 미국 정부도 더 이상 맥아더에게 휘둘리지 않고 한반도 문제를 객관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맥아더는 좁아진 입지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대통령이 성명을 준비 중인 휴전 제의를 자기가 먼저 나서 선수를 치거나(1951년 3월) △야당 지도자와 내통해 트루먼 정부의 한반도 정책을 비판(1951년 4월)하는 등 불충을 거듭하다가, 결국 4월 11일 해임을 당하기에 이른다.
“저는 이제 52년 군복무를 마칩니다. 제가 육사 연병장에서 선서했던 그날부터 세상은 참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희망도 꿈도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저는 당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던 군가의 후렴구를 아직 기억합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가사죠. 그 군가의 노병처럼 저 역시 군 경력을 마무리하고 사라지려 합니다. 신께서 알려주신 의무에 대한 책임을 다했던 한 군인으로서 말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1951년 4월 19일 맥아더의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
해리 트루먼에게 해임당해 미국으로 돌아온 더글러스 맥아더가 1951년 4월 시카고 솔저필드 경기장에 모인 5만 명 군중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우리는 지난 3개월 동안 여덟 번의 연재에 걸쳐 맥아더의 생애, 한국전쟁과 관련한 공과를 살펴보았다. 이제 맥아더에 관한 다섯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이 인물에 관한 논의를 정리해 보려 한다. 첫 번째 질문은 ‘과연 맥아더는 위대한 장군이었나’라는 의문. 한국전쟁에서 그는 ‘명장’ 칭호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이기심과 공명심 때문에 전쟁 전체를 말아먹은 ‘졸장’에 불과했을까?
어디를 더 유심히 보느냐에 따라 답이 다르게 나올 수 있는 질문이다. ‘인천 상륙’만 끊어서 본다면 세상에 이보다 더한 명장이 존재하기 어렵고, 그야말로 하늘이 대한민국을 위해 특별히 내린 ‘신의 장수’라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1950년 10월과 11월 중공군 개입 과정에서 맥아더는 방심, 오만, 불충, 확증편향 등 자신의 나쁜 측면을 모조리 드러내며 전쟁을 완전히 망치고 말았다. 인천의 성공이 맥아더의 눈을 완전히 가려 버렸고, 맥아더 때문에 거의 전쟁을 질 뻔 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결국 6·25 전쟁 맥아더의 종합적 평가는 ‘아집 때문에 졸장으로 전락한 명장’ 정도로 정리하는 것이 가장 객관적인 평가가 아닐까 싶다.
두 번째 질문. 맥아더는 북진 과정에서 무엇을 잘못했는가? 그의 가장 큰 잘못은 자신의 강력한 권한에 수반되어야 할 마땅한 책임마저 외면했다는 점이다. 맥아더는 인천 상륙을 성공하고 북한으로 진격하는 사이 세 차례 정도 무책임한 모습을 보였다. ①적에 대한 정찰과 대비를 소홀히 했고 ②예상보다 강력한 적의 침공 원인을 상관(대통령과 합참)과 부하(워커) 탓으로 돌렸으며 ③사태를 수습할 생각은 하지 않고 언론플레이로 시간만 끌다가 결정적인 골든타임을 흘려보내고 말았다.
계속 달라진 맥아더의 말. 박종범 기자
세 번째 질문. 중국의 대규모 개입(중공군 30만 명 파병)을 예상하지 못한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1차적으로 외국 정부와 그 수뇌부의 의도(마오쩌둥의 강력한 전쟁 개입 의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책임은 워싱턴에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외교라인(국무장관 애치슨), 정보당국(CIA)의 책임이 가장 컸고 드러난 자료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펜타곤(국방장관과 합참)도 중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문제다. 이 모든 문제에서 총체적인 책임을 지고 있었던 트루먼 대통령도 자유로울 수 없다. 저우언라이가 인도 외교관을 통해 미국 정부로 명백한 경고를 전달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중공군 개입을 준비하지 않은 것은 워싱턴 정부의 가장 뼈아픈 실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맥아더의 책임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1941년 12월에도 일본군 개입이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맥아더는 1950년 10월에도 자신의 나쁜 버릇인 ‘확증편향’을 반복하며, 중공군 개입 가능성을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군부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맥아더가 중공군 개입을 상정조차 안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정보참모들도 맥아더 구미에 맞는 첩보보고서만 생산하게 됐다. 그리고 관할 구역 내 적(중공군)의 동태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것은 맥아더 사령부의 책임이 가장 크다. 결국 트루먼의 워싱턴 정부에는 중국 정부의 강력한 저항 의지와 순망치한(북한이 무너지면 중국이 위협)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정치·외교적 책임이 존재한다. 그리고 맥아더의 도쿄 사령부에는 적의 위협을 발견하지 못하고 나중에 대응도 제대로 하지 못한 군사적 책임이 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50년 9월 29일 '수도 환도식'에서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사령관에게 일등무공훈장 수여증을 전달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네 번째 질문. 맥아더에게 한국은 무엇이었나? 그가 이승만에게 했던 다짐, “캘리포니아를 보호하듯이 한국을 지키겠다”는 맹세는 진심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군사적 명성을 높이기 위해 한국전쟁을 그저 하나의 도구로써 이용한 것뿐이었을까?
맥아더 전문가인 이상호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의 말을 인용하면 “맥아더는 자기 입장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자 했던 군인이었을 뿐”이고 “한국인이 맥아더를 일방적으로 좋게 해석하는 것은 맥아더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맥아더는 미국의 방어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한 애치슨 선언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였고, 1949년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는 결정에도 동의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한국전쟁 내내 자신의 기본적인 임무는 한반도를 방어하는 게 아니라 ‘소련의 남하로부터 일본 열도를 지키는 일’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맥아더가 한국전쟁 과정에서 △대만군 참전 △원자폭탄 사용 △만주 폭격을 주장하며 줄기차게 확전을 시도했던 것도 한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군사적 성과를 향후 미 대선으로 이어가려는 정치적 의도였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여러모로 맥아더의 덕을 많이 본 일본인들이 그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이해가 간다고 해도, 한국이 맥아더의 과오까지 애써 외면하며 그의 공만 높이 살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마지막 다섯 번째 질문. 맥아더 퇴장(해임)은 한국전쟁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맥아더가 리지웨이 부임 이후에도 계속 한반도 작전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며 ‘한국전쟁의 얼굴마담’으로 남아 있었다면 전쟁의 양상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대만군을 끌어들이고 만주를 폭격하고 중국에 원자탄을 사용했더라면, 한반도 통일이라는 염원을 과연 달성할 수 있었을까?
이 대답에는 ‘그렇다’고 말하기가 매우 어렵다. 당시 참전을 결정한 마오쩌둥의 결기는 대단했다. 워싱턴 정부나 도쿄 맥아더 사령부는 “중국 본토를 통일(1949년)한 지 1년밖에 안 되는 중국공산당이 내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과 전쟁을 할 리가 없다”고 확신했지만, 마오쩌둥은 “100대의 주먹을 맞지 않으려면 한 대를 먼저 때려야 한다”는 논리로 미국과의 전쟁을 감수했다. 당시 마오쩌둥은 미국의 원자탄을 얻어맞고 수백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최악의 상황까지도 염두에 두고 중공군 파병을 결정했다. 맥아더 말대로 확전을 했다면 중국공산당이 수백만 병력을 한반도에 쏟아붓고, 소련이 지상군을 투입하는 ‘세계대전’으로 비화했을 수도 있다. 당시는 이미 소련도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한 상태였기 때문에, 전쟁이 제한전(특정 목표 달성을 위해 무력을 정해 둔 선까지만 투입)에서 전면전(국력을 무제한으로 투입)으로 비화했다면 한반도에 원자폭탄이 사용됐을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맥아더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규모의 전쟁을 계속 주장하며, 책임지지 못할 얘기를 계속 내뱉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1951년 4월 11일 트루먼의 맥아더 해임은 늦었지만 매우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맥아더의, 맥아더에 의한, 맥아더를 위한 전쟁’이었던 한국전쟁은 맥아더가 퇴장하고서야 비로소 장군 개인의 카리스마가 아닌 전쟁 지도부(대통령·합참)와 군사 지휘관의 합리적 판단에 따라 의사가 결정되는 정상적인 전쟁으로 변화하게 됐다.
노병은 그렇게 사라졌다. 결코 아름답지 못한 모습으로.
◆기사 작성에 참고한 자료
<유엔군의 반격과 중공군의 공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⑥ ⑦’
-심호섭 ‘한국전쟁에서 미국과 중국의 첫 본격적인 대결: 중공군 2차공세와 미군의 ‘가장 긴 퇴각’에 대한 작전적 차원의 분석과 평가를 중심으로’
-Bill Mossman ‘Ebb and Flow’
-Clay Blair ‘The Forgotten War’
-Joseph Goulden ‘Korea-The Untold Story of the War’
-Roy Appleman ‘Disaster in Korea’
-Roy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맥아더의 행적>
-이상호 ‘맥아더와 한국전쟁’
-James Ellman ‘MacArthur Reconsidered’
-Stanley Weintraub 'MacArthur's War'
-Stephen Taffee ‘MacArthur’s Korean War Generals’
<회고록>
-백선엽 ‘군과 나’
-Douglas MacArthur ‘Reminiscences’
-J. Lawton Collins ‘War in Peacetime’
<당시 미국 정부의 대응>
-H. W. Brands ‘The General vs. The President’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이영창 논설위원 anti092@hankookilbo.com
6·25 기획 ‘명장’이 다루는 마지막 장군은 더글러스 맥아더입니다. 맥아더에 대해선 할 말이 참 많습니다. 관련 기록도 방대하고, 평가도 극단적으로 갈립니다. 그래서 한국일보는 맥아더만큼은 한 번에 끝내지 않고, 세 달에 걸쳐 세 번(상·중·하)으로 나눠 최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다루고자 합니다. 4월 출고되는 마지막 세 번째 파트(하편)는 맥아더 군사 경력의 최대 오점인 1950년 겨울 중공군 개입을 다룹니다. △중공군의 1·2차 공세 △중공군 공세에 밀린 맥아더의 대응 등 두 차례로 나눠 연재합니다. 이 글은 그중 마지막 연재입니다.
오리지널골드몽
※ '거인의 퇴장 ①'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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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이야기무료머니
더글러스 맥아더(오른쪽) 유엔군사령관과 매슈 리지웨이(왼쪽) 미8군사령관이 1951년 4월 초 강원 양양 지역을 순시하고 있다. 중간에 보이는 인물은 맥아더 사령부 참모장인 도일 히키 소장이다. 미 국립문서기록 릴게임갓 관리청
“우린 완전히 새로운 전쟁에 직면했다(We face an entirely new war). 본 사령부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지금 상황은 본 사령부의 통제와 역량을 벗어난 상태다.”
1950년 11월 28일 새벽 백경게임랜드 . 미국 펜타곤에서 밤을 새우던 당직 대령 존 비시라인은 더글러스 맥아더의 도쿄 사령부에서 날아온 긴급 전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불과 4일 전 크리스마스 공세(Home by Christmas Offensive)를 시작하며 “금방 전쟁을 끝낼 것”이라고 큰소리치던 맥아더가 갑자기 “전쟁을 지고 있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직 장교가 도저히 대처 릴게임몰메가 할 수 없는 사태였다. 그래서 대령은 육군 작전·행정 참모부장(참모차장 바로 아래)인 매슈 리지웨이 중장을 긴급 호출했다. 이때가 오전 4시 15분이다.
맥아더 전문 내용을 들은 리지웨이 역시 육군 선에서 대응할 문제가 아니란 걸 직감했다. 이건 대통령에게 즉각 보고해야 할 사안이었다. 리지웨이는 곧바로 로턴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을 호출했고, 콜린스가 다시 오마 브래들리 합동참모의장을 통해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알렸다. 트루먼은 그날 즉시 워싱턴 외교·안보 핵심 관계자를 모두 불러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소집했다. 대통령 트루먼, 부통령 앨번 바클리, 국무장관 딘 애치슨, 국방장관 조지 마셜, 합참 구성원(의장+3군참모총장), 중앙정보국(CIA) 국장 월터 베델 스미스, 대통령 특별보좌관 애브럴 해리먼이 모였다. 재무장관 존 스나이더까지 소환된 긴급 회의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왜 갑자기 맥아더가 이런 불길한 보고를 보낸 거지? NSC는 충격과 혼란에 사로잡혔다. 맥아더는 한 달 반 전(10월 15일) 트루먼을 만나 “중공군이 한반도에 들어오면 지상 최대의 살육전을 안겨줄 것”이라고 자신했고, 4일 전엔 중공군 숫자가 많아봐야 7만 명일 거라며 “크리스마스 전에 병사들을 집에 돌려보낼 것”이라 말하지 않았나. 워커 휘하 병력이 24만 명인데, 어떻게 7만 명 중공군을 상대하며 ‘통제와 역량을 벗어난 상태’까지 상황이 나빠질 수 있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 가지 않는 것투성이었다.
“(바로 나흘 전) 크리스마스까지 전쟁 끝내겠다는 그 말, 진짜 맥아더가 한 말이 맞습니까? 그게 맞다면 그 사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았던 건가요?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했던 겁니까?”
(11월 28일 NCS에서 부통령 바클리가 던진 질문)
워커와 맥아더가 1950년 10월 20일 평양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해리 트루먼 도서관
⑤도쿄 11월 28일: 미몽 탈출
애석하게도 워싱턴에선 부통령의 이 질문에 대답해 줄 사람이 없었다. 국방장관이나 합참이 가장 당황했던 대목은 맥아더가 돌연 “전구사령관(맥아더)의 능력으로 해결 불가능한 전 세계적 상황”으로 이 전쟁을 규정했다는 점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기 능력 안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겠다고 자신했던 맥아더는 갑자기 전지전능함을 부정하고 워싱턴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 하고 있었다. 이제 트루먼, 마셜, 합참이 이 전쟁을 직접 챙겨야만 했다.
펜타곤이 ‘한반도 철수 방안’까지 고려(당시 리지웨이가 육군참모차장과 논의)할 정도로 워싱턴 전체가 충격에 휩싸인 그때, 맥아더는 8군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과 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을 도쿄사령부로 불러 대책을 추궁하고 있었다. 맥아더가 책임을 대통령에게 떠넘길 정도로 혼이 나간 반면, 두 야전사령관 워커와 알몬드는 맥아더만큼 충격을 받진 않았다. 서부전선 워커는 후퇴하는 병력을 추슬러 평양 사수를 할 수 있겠다고 답했고, 항상 지략보다 용기가 앞섰던 동부전선 알몬드는 그 상황에서도 북쪽과 서쪽으로 더 진격할 수 있다고 배포 있게 말했다.
바쁜 야전사령관들을 급하게 불러 놓고도, 맥아더는 얘기를 듣기만 했을 뿐 뭔가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단지 워커에겐 “가능하면 평양을 사수하되 상황에 따라 포기하게”라며 하나 마나 한 지시를 내렸고, 공격하겠다는 알몬드에겐 “함흥-흥남 라인을 지키고 있게”라고 충고하는 정도에 그쳤다. 9년 전(1941년 12월 일본의 필리핀 침공)에도 그랬던 것처럼, 평화 시엔 큰소리를 치다가 막상 위기에 처하면 결정을 회피한 채 움츠리는 맥아더의 버릇이 이번에도 반복됐다.
“그때 거기서 맥아더를 잘라 버렸어야 했는데…”
(해리 트루먼이 1950년 11월 말을 돌이키며 남긴 회고)
1950년 10월 15일 한국전쟁 논의를 위해 남태평양 웨이크섬에서 만난 해리 트루먼(왼쪽) 대통령과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악수하고 있다. 미 국무부(위키미디어 커먼스)
워싱턴에서 벌집 쑤신 듯 북새통이 벌어지고, 두 부하 사령관(워커·알몬드)이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는 사이, 맥아더는 난리가 난 한국에 갈 생각은 하지 않고 도쿄에 앉아 ‘면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주요 언론과의 연쇄 인터뷰를 통해 "트루먼 행정부가 유럽에만 신경을 쓰고 아시아는 소홀히 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터진 것"이라며 워싱턴을 겨냥했다. US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와의 서면 인터뷰를 통해 “유엔이나 다른 곳에서 중공군 공격에 대한 아무런 경고가 없었다”면서 정보 실패 책임을 본국 정부에 떠넘겼다. 그리고 “국경 지대에 대한 공중 정찰도 허용되지 않았다”면서 “군사 역사상 이렇게 많은 핸디캡을 안고 싸운 경우는 없었다”고 대통령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맥아더의 변명은 사실과 정반대였다. 미국 역사상 1950년 7~11월의 맥아더처럼 지역사령관이 본국 정부 의견을 외면하고 마음대로 전략 방향까지 결정한 예는 없었고, 그렇게나 자주 대통령과 합참의 지시를 무시하고도 자리를 보존했던 군사 지휘관은 맥아더가 유일했다. ‘미군 역사상 이렇게 폭넓은 재량권을 쥐고 싸운 장군은 없었다’고 말하는 게 오히려 더 사실에 부합한다. 맥아더가 하도 적반하장으로 나오니 군 후배들 사이에서도 맥아더의 오만함을 응징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12월 초 리지웨이는 합참이 맥아더에게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기로 결정하자 호이트 반덴버그(웨스트포인트 후배) 공군참모총장에게 “합참은 명령을 어기는 어떤 사령관이라도 해임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강하게 따져 묻기도 했다.
트루먼과 맥아더의 갈등 사례. 송정근 기자
그럼에도 트루먼은 그때부터 5개월을 더 맥아더를 지켜보다가 1951년 4월 중순에야 해임 명령을 내렸다 그 이유에 대해 트루먼은 “전투에 졌다고 사령관을 해임하는 것으로 보이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라며 “대통령의 체면을 무시한 장군이라 할지라도 그의 체면을 지켜 줘야만 했다”고 설명했다. 트루먼은 “내 부하는 내가 지켜야 했다”고도 말했다. 개인적으론 매우 성마르고 직선적인 성격이었던 트루먼이었지만, 맥아더의 즉각적 해임이 국가에 가져올 충격파를 감안해 개인적 모욕을 잠시 감내하는 선공후사 대범함을 보여준 것이다.
맥아더가 당시 한반도 상황을 얼마나 오판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명백한 사례가 하나 있다. 맥아더는 1950년 12월까지도 한반도에 파병된 중공군 사령관을 린뱌오(林彪·임표)로 알고 있었다. 린뱌오는 국공내전에서 최고의 공을 세운 중공군 제1의 명장이긴 했지만, 미국과의 전쟁에 반대해 실제론 한국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다. 한반도에 들어온 중공군의 총사령관은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였는데, 맥아더는 적 총사령관이 누구인지도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정보 수집에 손을 놓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시점까지도 여전히 중공군 총병력을 20만 명(실제 30만 이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해가 진 후 평양 동쪽을 지나는 길이었다.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아 밤하늘을 밝혔고, 수많은 피란민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미군 보급소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워커 사령관이 보급 물자를 모조리 불태우도록 명령했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불더미로 들어가 옷 한 개라도 건지려 했고, 미군이 위협사격을 하며 쫓아내는 광경도 볼 수 있었다.”
(당시 국군1사단장 백선엽이 목격한 평양 철수)
1950년 12월 3일 북한의 피란민들이 평양 대동강을 맨발로 건너 남쪽으로 피란을 가고 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⑥평양 12월 3일: 한 많은 대동강
“아버지, 생신 축하합니다.”
12월 3일은 워커의 예순한 번째 생일이었다. 한 젊은 장교가 평양의 8군사령관 지휘차량으로 다가가 사령관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워커가 서른여섯에 낳은 늦둥이(당시 기준) 외아들 샘 워커(25) 대위였다. 샘은 아버지와 함께 한국전쟁에 참전해 당시 24사단 중대장으로 대동강 철교 경비 업무를 맡고 있었는데, 아버지 생일 축하를 위에 잠시 사령부를 찾은 것이었다. 워커가 교통사고로 순직하기 불과 20일 전이다. 이때가 아들이 아버지에게 건네는 마지막 생일 축하가 될 거라곤 당시로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때 워커는 사실 생일 따위를 챙길 여유가 없었다. 이날 워커는 “4일 오전 8시를 기해 모든 유엔군 병력은 평양에서 철수하라”는 총퇴각 명령을 내렸다. 맥아더와의 도쿄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11월 29일 오후, 워커는 청천강 쪽 전선 상황이 시시각각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사라졌던 중공군은 여기저기에서 신출귀몰 중이었고, 중공군 출몰 지점에선 아군의 패퇴 소식만 전해졌다. 지금 속도대로 계속 밀린다면 평양에 방어선을 친다 한들 측면이 뚫려서 곧바로 포위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결국 “평양을 사수하겠다”는 말을 맥아더에게 남기고 왔던 워커는 생각을 바꿔 평양 포기를 결심했다. 맥아더에게 평양 철수 승인을 요청하는 보고를 보냈지만,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평양 철수는 워커 스스로 결정한 일이었다.
1950년 12월 4일 피란민들이 평양 대동강의 부서진 다리를 넘어 남쪽으로 피란을 가고 있다. 이 사진을 찍은 맥스 데스포어는 이듬해 퓰리쳐상을 수상했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유엔군 패주 소문이 이미 널리 퍼져 있어, 12월 3일부터 민간인의 피란 행렬이 시작됐다. 당시 미군은 평양과 그 주변에서 남하하려던 피란민을 30만 명 정도로 추정했는데, 대동강을 지나는 다리들이 속속 끊어져 일부 피란민들은 물살을 헤치고 직접 강을 건너거나 부서진 철교 위를 위험하게 걸어 남쪽으로 대피했다. 당시 평양에 있었던 백선엽은 “대동강에 가설된 부교까지 폭파돼 피란민들이 필사적으로 강을 건너다 차디찬 물에 빠져 죽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워커는 땅을 조금씩 내주며 순차적으로 후퇴하는 방식이 아니라 신속한 퇴각을 결정했다. 청천강에서 물러난 뒤 평안남도 남부지방이나 황해도에서 방어선을 치지 않고, 곧바로 서울 북방 임진강까지 250㎞를 한 번에 물러난 것이다. 워커의 이 신속한 총퇴각은 두고두고 아쉬움을 남긴 결정이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이렇게 포기한 평양과 개성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다시는 되찾지 못했다. 한반도 통일은 이때의 평양 철수와 함께 사실상 물 건너간 일이 돼 버렸다. 나중에 알게 된 중공군 보급 능력(1주일 이상 공세를 지속하기 어려움)을 감안할 때, 만약 당시 워커가 지형을 이용해 평양 인근에서 견고한 방어선을 유지했더라면, 중공군 공세를 한두 번 격퇴하고 다시 북진을 시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런 아쉬움은 모두 결과론적인 해석이다. 오히려 △워커의 공격 지향적인 평소 스타일 △일선부대 상황을 세세하게 챙겼던 지휘 철학 △전장의 지형을 중시했던 철저한 준비성 등을 감안한다면, 당시 현장에서 모든 상황을 다 조망할 수 있었던 워커의 선택이 합리적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게 맞다. 급사한 워커가 남긴 회고록이 없어 당시 어떤 생각으로 후퇴 결정을 내렸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워커와 가까웠던 8군 군수참모(G-4) 앨버트 스테빈스 대령의 증언을 참조하면 ‘8군 병력을 지키기 위해’ 이런 대대적인 퇴각 명령을 내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전한 후방에서 장기간 전력 보강 작업을 하지 않고서는 반격조차 시도할 수 없을 정도로 8군의 상태가 엉망이었다는 얘기다. 오히려 워커가 명백하게 잘못한 부분은 1차 공격(10월 추수감사절 공세) 당시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패퇴한 국군 2군단을 2차 공격(11월 크리스마스 공세)에서도 똑같이 우익에 단독으로 배치했다는 점이다. 국군1사단을 미 1군단에 배속했던 것처럼, 국군2군단 예하 3개 사단을 분산시켰다면 미군이 국군을 지원하면서 중공군 공세를 버텼을 수도 있다.
“맥아더 장군과 워커의 후임자를 누구로 앉힐지 논의한 적이 있었다. 워커는 항상 위험한 전투 현장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만약을 대비해야 했다. 맥아더는 리지웨이를 원했다. 나도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당시 육군참모총장 로턴 콜린스의 회고)
월튼 워커 장군. 위키미디어 커먼스
워커는 몇 가지 아쉬운 결정을 내리긴 했지만, 순직 직전 의도치 않게 한국에 ‘마지막 선물’을 안겨주기도 했다. 도저히 맥아더를 믿을 수 없었던 트루먼과 합참은 육군참모총장 콜린스를 한국에 보내 직접 전선 상황을 파악하도록 했는데, 워싱턴이 한반도 포기까지도 고려하고 있던 순간에 워커는 육군참모총장을 향해 ‘충분히 싸울 만하다’는 희망을 불어넣었다. 12월 4일 콜린스를 만난 워커는 “지금 병력만으로도 서울에서 충분히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고, 잠시 서울을 잃더라도 낙동강 방어선으로 후퇴해 전열을 가다듬은 뒤 재반격할 수 있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콜린스는 ‘상황이 나쁘긴 했지만 절망적인 상태는 아니다’라는 판단을 내렸고, 8군의 저항 의지를 합참과 대통령에게 소상히 전달했다. 이 덕분에 미국 정부는 철수 대신 항전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당시 합참의장 브래들리는 “콜린스의 보고를 듣고 햇살이 비치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는데, 그 햇살은 실은 워커에게서 시작된 것이었다.
이때 맥아더는 부하들의 사기를 고무하기는커녕 워커의 방어 계획에 재를 뿌리고 있었다. 12월 초 맥아더는 본국 정부에 “대만군을 끌어들이자”거나 “만주 폭격을 허가해 달라”며 확전을 시도하고 있었다. 또 도쿄를 방문한 콜린스를 만나선 “본국 정부가 추가 병력을 지원하지 않으면 한반도에서 물러나야 할 것”이라며 엄포를 놓았다. 맥아더가 이렇게 무리한 요구를 계속한 이유는 ‘워싱턴이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 전쟁에서 진 것’이라는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인 것처럼 보였다. 워싱턴은 맥아더의 요구를 모두 물리치자, 맥아더는 이를 ‘패배주의’라고 거침없이 비판했다.
맥아더가 큰소리를 칠수록 그의 모습은 초라해 보였다. 맥아더가 한반도 상황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워싱턴도 눈치채기 시작했다. 맥아더를 대신해 콜린스를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보내자는 의견까지 나왔다. 인천에서 시작된 맥아더 신화는 여기저기에서 허물어지고 있었다.
“월튼 워커는 거칠고 좁은 한국의 빙판길에서 지프 속도를 한없이 높였다. 12월 23일 워커는 운전병, 부관, 경호원과 함께 지프를 타고 북쪽으로 가고 있었다. 갑자기 한국군 무기 운반 차량이 중앙선을 넘어 지프 앞으로 뛰어들었고, 워커의 차는 충돌을 피하다 전복됐다. 워커는 즉사했다.”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1950년 12월 15일 월튼 워커 미8군사령관이 타흐신 야즈즈 튀르키예 1여단장(당시 준장)에게 은성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워커는 이 사진을 찍은 뒤 8일 후 사고로 사망했다. 미 육군(위키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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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서울 12월 23일: 한 영웅의 죽음
미8군사령관 워커가 1950년 12월 23일 사망했다. 워커는 서울 북방에 주둔하던 미24사단과 영국27여단을 방문해 수훈 장병들을 표창할 예정이었다. 그 길에 아들 샘(24사단 중대장)을 만나 크리스마스 휴일을 함께 보낼 생각이었다. 워커의 지프는 이날 오전 10시 30분 경기 양주군 도봉리(현재 서울 도봉역 인근)에서 국군 6사단 화물차와 충돌해 길 밖으로 이탈했다. 워커는 머리를 크게 다쳤고 근처 24사단 야전치료소로 이송됐으나, 군의관이 10시 50분 워커의 사망을 확인했다.
워커의 죽음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다. 이미 당시 맥아더의 행보를 보면 한반도를 거의 포기한 것 같았다. 그 즈음 맥아더가 워싱턴에 보낸 보고를 보면 철수(evacuation)라는 말이 자주 보였다. 대만군 또는 미군 부대를 추가로 지원하지 않을 거면, 미군 병력을 모두 일본으로 빼 가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실상 1950년 12월의 한국전쟁은 워커 혼자 끌고 가는 양상이었고, 워커가 국군과 유엔군의 후방 철수 작전을 책임지고 있었다. 악전고투하던 워커마저 갑자기 사망하자 유엔군은 완벽한 지휘부 공백 상태에 빠졌다. 워커의 급사로 1군단장 프랭크 밀번 소장이 8군사령관직을 대행했다. 밀번은 온화하지만 소극적이었고, 리더십 있는 장군도 아니어서, 위기에 빠진 대군을 오래 지휘하게 둘 수는 없었다. 워싱턴이 빨리 워커 후임을 보내야 했다.
그나마 한국 국민이나 미국 정부에 정말 다행이었던 점은 명장 워커의 후임이 또 다른 명장 리지웨이였다는 점이다. 2차 대전 유럽 전선에서 사단장과 군단장을 지낸 뒤 펜타곤에서 요직(육군참모부장)을 꿰찬 리지웨이는 당시 미국이 전쟁 지역 야전사령관으로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인재였다. 리지웨이는 워커 사망 소식을 들은 뒤 인사 명령을 받고 곧바로 극동으로 날아와 12월 26일 도쿄를 거쳐 한국에 도착했다. 도쿄에서 리지웨이를 만난 맥아더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맥아더는 리지웨이에게 “8군은 자네 소관일세”라며 “자네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하게”라고 당부했다. 중공군의 갑작스러운 개입으로 패색이 짙어진 단계에 이르자, 그제야 맥아더는 야전사령관에게 전권을 부여했다. 리지웨이에게 모든 책임을 넘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워커 사망 후 리지웨이 일정. 송정근 기자
“매슈 리지웨이가 한 일은 전쟁을 하는 데 최고사령관(맥아더)이 필수불가결한 인물이 아니란 점을 입증한 것이다. 리지웨이가 적과 싸우는 동안 맥아더는 워싱턴과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윌리엄 맨체스터의 전기 ‘맥아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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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에필로그: 거인의 마지막
리지웨이의 등장(1950년 12월 26일)은 3년의 6·25 전쟁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였다. 리지웨이 부임 이후 맥아더가 한국전쟁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다. 맥아더가 떠넘긴 책임을 모두 등에 진 리지웨이는 후퇴(1·4후퇴)와 반격 작전(1951년 1~4월)을 보란 듯이 훌륭하게 해냈다. 리지웨이는 유엔군과 국군에 ‘공격정신’을 강조하며 북위 37도선까지 물러났던 전선을 3개월 만에 다시 38도선까지 올리는 데 성공했다. 리지웨이의 의지가 없었다면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 4차공세(1951년 2월)와 춘계공세(4·5월)를 버티지 못하고 한반도 전역을 공산군 손에 내줬을 수도 있었다. 리지웨이의 가장 큰 공은 ‘맥아더 없이도 이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는 걸 눈으로 보여준 것이다. 맥아더는 리지웨이의 공세 계획을 그저 승인해 주는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기에 이르렀다.
리지웨이의 성공이 쌓이면서 인천의 환상에서 벗어난 미국 정부도 더 이상 맥아더에게 휘둘리지 않고 한반도 문제를 객관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맥아더는 좁아진 입지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대통령이 성명을 준비 중인 휴전 제의를 자기가 먼저 나서 선수를 치거나(1951년 3월) △야당 지도자와 내통해 트루먼 정부의 한반도 정책을 비판(1951년 4월)하는 등 불충을 거듭하다가, 결국 4월 11일 해임을 당하기에 이른다.
“저는 이제 52년 군복무를 마칩니다. 제가 육사 연병장에서 선서했던 그날부터 세상은 참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희망도 꿈도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저는 당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던 군가의 후렴구를 아직 기억합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가사죠. 그 군가의 노병처럼 저 역시 군 경력을 마무리하고 사라지려 합니다. 신께서 알려주신 의무에 대한 책임을 다했던 한 군인으로서 말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1951년 4월 19일 맥아더의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
해리 트루먼에게 해임당해 미국으로 돌아온 더글러스 맥아더가 1951년 4월 시카고 솔저필드 경기장에 모인 5만 명 군중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우리는 지난 3개월 동안 여덟 번의 연재에 걸쳐 맥아더의 생애, 한국전쟁과 관련한 공과를 살펴보았다. 이제 맥아더에 관한 다섯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이 인물에 관한 논의를 정리해 보려 한다. 첫 번째 질문은 ‘과연 맥아더는 위대한 장군이었나’라는 의문. 한국전쟁에서 그는 ‘명장’ 칭호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이기심과 공명심 때문에 전쟁 전체를 말아먹은 ‘졸장’에 불과했을까?
어디를 더 유심히 보느냐에 따라 답이 다르게 나올 수 있는 질문이다. ‘인천 상륙’만 끊어서 본다면 세상에 이보다 더한 명장이 존재하기 어렵고, 그야말로 하늘이 대한민국을 위해 특별히 내린 ‘신의 장수’라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1950년 10월과 11월 중공군 개입 과정에서 맥아더는 방심, 오만, 불충, 확증편향 등 자신의 나쁜 측면을 모조리 드러내며 전쟁을 완전히 망치고 말았다. 인천의 성공이 맥아더의 눈을 완전히 가려 버렸고, 맥아더 때문에 거의 전쟁을 질 뻔 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결국 6·25 전쟁 맥아더의 종합적 평가는 ‘아집 때문에 졸장으로 전락한 명장’ 정도로 정리하는 것이 가장 객관적인 평가가 아닐까 싶다.
두 번째 질문. 맥아더는 북진 과정에서 무엇을 잘못했는가? 그의 가장 큰 잘못은 자신의 강력한 권한에 수반되어야 할 마땅한 책임마저 외면했다는 점이다. 맥아더는 인천 상륙을 성공하고 북한으로 진격하는 사이 세 차례 정도 무책임한 모습을 보였다. ①적에 대한 정찰과 대비를 소홀히 했고 ②예상보다 강력한 적의 침공 원인을 상관(대통령과 합참)과 부하(워커) 탓으로 돌렸으며 ③사태를 수습할 생각은 하지 않고 언론플레이로 시간만 끌다가 결정적인 골든타임을 흘려보내고 말았다.
계속 달라진 맥아더의 말. 박종범 기자
세 번째 질문. 중국의 대규모 개입(중공군 30만 명 파병)을 예상하지 못한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1차적으로 외국 정부와 그 수뇌부의 의도(마오쩌둥의 강력한 전쟁 개입 의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책임은 워싱턴에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외교라인(국무장관 애치슨), 정보당국(CIA)의 책임이 가장 컸고 드러난 자료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펜타곤(국방장관과 합참)도 중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문제다. 이 모든 문제에서 총체적인 책임을 지고 있었던 트루먼 대통령도 자유로울 수 없다. 저우언라이가 인도 외교관을 통해 미국 정부로 명백한 경고를 전달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중공군 개입을 준비하지 않은 것은 워싱턴 정부의 가장 뼈아픈 실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맥아더의 책임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1941년 12월에도 일본군 개입이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맥아더는 1950년 10월에도 자신의 나쁜 버릇인 ‘확증편향’을 반복하며, 중공군 개입 가능성을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군부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맥아더가 중공군 개입을 상정조차 안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정보참모들도 맥아더 구미에 맞는 첩보보고서만 생산하게 됐다. 그리고 관할 구역 내 적(중공군)의 동태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것은 맥아더 사령부의 책임이 가장 크다. 결국 트루먼의 워싱턴 정부에는 중국 정부의 강력한 저항 의지와 순망치한(북한이 무너지면 중국이 위협)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정치·외교적 책임이 존재한다. 그리고 맥아더의 도쿄 사령부에는 적의 위협을 발견하지 못하고 나중에 대응도 제대로 하지 못한 군사적 책임이 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50년 9월 29일 '수도 환도식'에서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사령관에게 일등무공훈장 수여증을 전달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네 번째 질문. 맥아더에게 한국은 무엇이었나? 그가 이승만에게 했던 다짐, “캘리포니아를 보호하듯이 한국을 지키겠다”는 맹세는 진심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군사적 명성을 높이기 위해 한국전쟁을 그저 하나의 도구로써 이용한 것뿐이었을까?
맥아더 전문가인 이상호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의 말을 인용하면 “맥아더는 자기 입장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자 했던 군인이었을 뿐”이고 “한국인이 맥아더를 일방적으로 좋게 해석하는 것은 맥아더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맥아더는 미국의 방어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한 애치슨 선언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였고, 1949년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는 결정에도 동의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한국전쟁 내내 자신의 기본적인 임무는 한반도를 방어하는 게 아니라 ‘소련의 남하로부터 일본 열도를 지키는 일’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맥아더가 한국전쟁 과정에서 △대만군 참전 △원자폭탄 사용 △만주 폭격을 주장하며 줄기차게 확전을 시도했던 것도 한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군사적 성과를 향후 미 대선으로 이어가려는 정치적 의도였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여러모로 맥아더의 덕을 많이 본 일본인들이 그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이해가 간다고 해도, 한국이 맥아더의 과오까지 애써 외면하며 그의 공만 높이 살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마지막 다섯 번째 질문. 맥아더 퇴장(해임)은 한국전쟁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맥아더가 리지웨이 부임 이후에도 계속 한반도 작전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며 ‘한국전쟁의 얼굴마담’으로 남아 있었다면 전쟁의 양상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대만군을 끌어들이고 만주를 폭격하고 중국에 원자탄을 사용했더라면, 한반도 통일이라는 염원을 과연 달성할 수 있었을까?
이 대답에는 ‘그렇다’고 말하기가 매우 어렵다. 당시 참전을 결정한 마오쩌둥의 결기는 대단했다. 워싱턴 정부나 도쿄 맥아더 사령부는 “중국 본토를 통일(1949년)한 지 1년밖에 안 되는 중국공산당이 내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과 전쟁을 할 리가 없다”고 확신했지만, 마오쩌둥은 “100대의 주먹을 맞지 않으려면 한 대를 먼저 때려야 한다”는 논리로 미국과의 전쟁을 감수했다. 당시 마오쩌둥은 미국의 원자탄을 얻어맞고 수백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최악의 상황까지도 염두에 두고 중공군 파병을 결정했다. 맥아더 말대로 확전을 했다면 중국공산당이 수백만 병력을 한반도에 쏟아붓고, 소련이 지상군을 투입하는 ‘세계대전’으로 비화했을 수도 있다. 당시는 이미 소련도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한 상태였기 때문에, 전쟁이 제한전(특정 목표 달성을 위해 무력을 정해 둔 선까지만 투입)에서 전면전(국력을 무제한으로 투입)으로 비화했다면 한반도에 원자폭탄이 사용됐을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맥아더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규모의 전쟁을 계속 주장하며, 책임지지 못할 얘기를 계속 내뱉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1951년 4월 11일 트루먼의 맥아더 해임은 늦었지만 매우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맥아더의, 맥아더에 의한, 맥아더를 위한 전쟁’이었던 한국전쟁은 맥아더가 퇴장하고서야 비로소 장군 개인의 카리스마가 아닌 전쟁 지도부(대통령·합참)와 군사 지휘관의 합리적 판단에 따라 의사가 결정되는 정상적인 전쟁으로 변화하게 됐다.
노병은 그렇게 사라졌다. 결코 아름답지 못한 모습으로.
◆기사 작성에 참고한 자료
<유엔군의 반격과 중공군의 공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⑥ ⑦’
-심호섭 ‘한국전쟁에서 미국과 중국의 첫 본격적인 대결: 중공군 2차공세와 미군의 ‘가장 긴 퇴각’에 대한 작전적 차원의 분석과 평가를 중심으로’
-Bill Mossman ‘Ebb and Flow’
-Clay Blair ‘The Forgotten War’
-Joseph Goulden ‘Korea-The Untold Story of the War’
-Roy Appleman ‘Disaster in Korea’
-Roy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맥아더의 행적>
-이상호 ‘맥아더와 한국전쟁’
-James Ellman ‘MacArthur Reconsidered’
-Stanley Weintraub 'MacArthur's War'
-Stephen Taffee ‘MacArthur’s Korean War Generals’
<회고록>
-백선엽 ‘군과 나’
-Douglas MacArthur ‘Reminiscences’
-J. Lawton Collins ‘War in Peacetime’
<당시 미국 정부의 대응>
-H. W. Brands ‘The General vs. The President’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이영창 논설위원 anti09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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