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트 신고하기 이미지 확대보기

거문도 영국군묘지

  • 주소 전남 여수시 삼산면 거문길 1
  • 연락처  
  • 홈페이지  
  • 주차대수  
  • 할인정책  
  • 요금안내  
  • 기타  

​​​​​​​​

​​​​​​​​​​​​​​​​​​​​​​​​

 

 

​​​​​​​​

​​​​​​​​​​​​​​​​​​​​​​​​​​​​​​​​



 



 


​​​​​​​​ 

상세설명

​​1885년(고종 22년) 전 세계에 제국주의의 야욕을 펼치던 영국은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 부심하던 차 거문도의 전략적 가치를 염두에 두고 30여 년에 걸쳐 탐색한 결과 이곳을 무단 점령한다. 이 약탈자들은 청나라와 일본에게는 점령 사실을 통보해 주었으나 당사자인 조선에는 가장 늦게 마지못해 알려준다. 기가 막힌 일이다.
선량한 얼굴을 하고 거문도 주민들의 환심을 산다. 막사를 짓고 창고를 건설하는데 주민들을 동원하고 임금을 지불한다. 대민접촉을 최소한으로 하면서 신사처럼 행동한다. 전략적 가치가 다 떨어지고 2년간 점령하고 물러간다. 그 사이 영국군 12명의 사체를 안치한 곳이 영국군 묘지이다. 영국 해군의 전통에 따르면 해상에서 사망 시 수장을 하고 전 투지에서 사망하면 현지에 무덤을 만든다고 한다. 일종의 영역을 표시하면서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는 방편의 하나이다. 영토를 넓히던 신라의 진흥왕이 순수비를 만드는 개념으로 이해하면 된다.
국사책에  ‘거문도사건’이라고 불리고  영어로는 ‘Port Hamilton Incident’ 혹은 ‘The British Occupation of Komundo’라고 기록된 영국 해군의 조선령 거문도 점령사건이다.  영국 해군은 1885년 4월 15일부터 1887년 2월 27일까지 거의 2년간 거문도를 자신들 멋대로 ‘해밀턴 항구’라고 부른다. 동도, 고도, 서도로 구성된 거문도는 고도가 중심이다. 항구에 들어서는데 배에서 눈에 띄는 모텔 이름이 해밀턴 모텔이었다. 웃어야 하는지 울어야 할지 난감했다. 해밀턴은 당시 영국 해군성의 장관 이름이다.
점령 후 2개월 만에 홍콩의 해군 사령부와 상해의 양자강과의 통신선이 깔린 정도로 신속하게 통신망을 구축한다. 조선에 전화가 들어와 연결된 것은 11년 후의 일이니 조선 최초의 전화선이 들어오게 된다. 거문도에는 조선 최초의 기록이 많다. 현재의 거문도 초등학교 자리가 영국군의 주둔지였고 최초의 테니스장이 건설된다. 전기도 서울보다 2년 먼저 경험한다, 당구는 물론 비스킷 같은 양과자와 통조림도 거문도 주민들은 경험한다. 한창 춘궁기인 4월에 영국군이 들어와서 거문도 주민들은 먹는 것부터 혜택을 누리면서 영국군을 열렬히 환영하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하다못해 조선 정부보다 약탈을 덜하게 되고 대접까지 받는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은 영국군 묘비를 훼손하여 현재는 거문도 주둔 시 사망한 영국 해군 비석 두 개와 1903년 거문도를 지나던 영국 알비온 전함에서 사망한 해군 1명을 기린 나무 십자가가 남아 있다. 서울 주재 영국대사관은 매년 이곳을 성묘하고 인근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고도의  포구 중심지에서 600M 떨어져 있다. 약간의 오르막길을 천천히 오르면 정겨운 돌담이 나온다. 바다의 전망이 나오는 길섶에는 채소밭이 탐스럽다. 그 길을 따라 오르면서 섬 앞으로 펼쳐지는 전망이 포근하다. 그래도 바람이라도 불면 싸나 운지 지붕은 밧줄로 묶여진 풍경이 이국적이다. 이곳이 전략적 요충지다 보니 여러 나라 세력들이 출입하였다. 서양의 각국은 물론 1905년에 일본의 어부들이 집단으로 이주하여 일본식 건물도 남아있다. 여수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친구 말에 따르면 거문도의 학생들은 고등학교를 여수로 다녔다고 한다. 중학교를 졸업하면 여수로 유학을 떠난 모양이다. 거문도는 여수와 제주도 사이에 위치한다. 지중해로 따지면 동아시아의 지브롤터 해협 정도 되는 아주 중요한 위치이다. 이곳을 선점하는 세력이 제해권을 차지한다. 당시 조선에는 아무 가치도 없는 버려지다시피한 섬에 영국의 최신의 기술을 투하하고 2년 만에 물러난다. 당시 영국 측 기록에는 섬 주민들은 불결하였으며 4-5세의 어린이도 담배를 피웠고 영어를 빨리 습득하는 영특함이 있었다고 기술한다.
영국 해군을 경계하기 위해 들어왔던 다른 나라의 군대들은 대체로 주민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러시아 해군은 군기가 문란하여 행패를 자주 부려 주민들과 자주 충돌했고, 프랑스 해군은 가는 곳마다 측량을 한답시고 지붕 위로 뛰어다녀서 주민들의 원성을 샀다. 네덜란드 해군은 "주민들의 곱게 테를 두른 모자가 인상적이었으며, 가는 곳마다 깃발을 많이 휘날렸다"고 회고했다. 네덜란드 군이 평가가 후한데 나가사키에서 유일하게 일본과 통상한 나라답다. 1960년대에 당시 어린 시절 영국군과 보낸 노인들을 조사한 결과 그들은 당시 영국군에게 배운 영어와 노래를 기억하고 있었고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영국군이 철수할 때도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보다 먼저 안다. 조선은 점령당했을 때나 영국군이 철수했을 때나 국제정치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왕따였다. 지금은 어떤지 심하게 반성해보아야 할 대목이다. 

 

주변관광지 콘텐츠
작성자 제목 상태

글이 없습니다.

위치정보

DAUM 로드뷰